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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동화


BY 최지인 2005-07-15

     비 오는 날의 동화

 

 비 오는 날 어쩌면 농촌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공유한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평소엔 늘 논으로 밭으로 땀냄새에 절어 바쁘게 살던 엄마가 비오는 날만큼은 호박꽃 같은 환한 미소로 집에서 나를 맞아 주셨다. 
 

 뭐 옛날에 우산이나 있었던가. 보물처럼 모셔진(?) 까만 우산 달랑 한 개는 우리의 귀하신 장남, 오빠의 차지였다. 나야 뭐 맨날 오빠 옆에서 운 좋으면 머리만 겨우 디밀어 학교로 갔다. 그나마 집에 올 때는 시간이 틀리니 마음만 끓일 뿐이었다. 그 시절은 꼭 나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학교 소사일을 보시는 털보 아저씨가 화단에서 잘라 준 커다란 파초잎을 둥그렇게 말아서 머리에 두르고 오곤 했다. 그때는 몸보다도 책이 젖을까 노심초사였다. 있는대로 몸을 오그려 종종거리고 오다보면 파초잎 줄기를 타고 내리던 빗소리는 저 혼자 뽑아올리던 노래에 지쳐 옷속으로 스며들었다. 잎과 몸사이에 미열처럼 감지되던 훈김이 안개처럼 훅훅 서리면 에라 모르겠다 냅다 냇가에 던져버리고 그냥 내쳐 달려오기 일쑤였다. 
 

 몸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져도 저만치 집 굴뚝에서 사방으로 퍼지며 낮게 깔리는 연기를 보면 어찌 그리도 좋든지. 시골의 농사일이란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새벽부터 밤까지 부모님은 집보다는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때문에 마당에 들어설 때마다 매번 가슴속에 성큼 들어서는 빈집의 외로움은 늘 내 차지였다. 빈 공간을 지키던 서늘한 공기를 내 작은 몸으로 휘젓고 다니며 덥혀 놓고 저녁을 지어놓아야 하는 일상은 도무지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시골아이의 숙명적인 테두리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비오는 날의 굴뚝 연기는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설레임을 뛰어 넘는 또 하나의 세상을 경험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우리 집 담을 옆에 끼고 선 가로등이 보일 때쯤이면 엄마가 호박 고갱이로 들기름 좍 발라 부치는 온갖 부침개 냄새가 뱃속으로부터 꼬르륵 소리를 먼저 이끌어내던 행복감은 무엇에도 견줄 수 없었다. 
 

 엄마가 비올 때 주로 해주시던 음식들은 모두가 그리움이고 추억이다. 멸치 국물에 호박이랑 감자를 듬뿍 썰어 넣고 길다란 홍두깨로 둘둘 말면서 밀어 만든 칼국수는 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신 음식이었다. 평상시엔 밥 한그릇 한 번 시원하게 비워낸 적이 없을 정도로 반찬 타박이 심하신 아버지도 그날 만큼은 두 세 그릇을 뚝딱 비워내셨다. 매운 고추를 잘게 다녀 넣은 양념 간장을 넣고 국물을 후후 불어 넘기시며 "어이구, 시원하다. 어이구 얼큰하다".를 연방 내뱉으시던 모습이 흐르는 땀을 닦느라 목에 걸려 있던 수건과 함께 떠오른다.
 

 집 텃밭에 야채란 야채는 모두 썰어 넣은 부침개는 먹성 좋은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고 찹쌀가루를 은근히 지져 그 안에 까만 설탕이나 팥소를 넣고 반을 접어 이쁜 꽃잎도 하나 얹은 찹쌀부꾸미는 내가 좋아하는 별식이었다. 이스트를 넣고 반죽한 밀가루를 아랫목에 이불 덮고 발효시켜 팥 듬뿍 넣고 쪄내던 동글동글한 찐빵은 여동생이 몇 끼를 밥 대신 먹을 정도로 좋아했고 쌀 한줌 모으기로 부녀회에서 공동으로 산 빵굽는 냄비에 구워낸 카스테라 맛 나던 빵은 막내 남동생이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엄마는 이 많은 음식을 골고루 지치지도 않고 돌아가면서 해주셨다. 일에 치여 마음 뿐 표현하지 못했던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라도 주어진 시간에 내리는 소나기처럼 퍼부어 주셨던 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난 그랬다. 그걸 먹는다는 기쁨보다 엄마 옆에 무릎 싸안고 앉아서 엄마가 하는 모든 그 일련의 요술작업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더 행복하고 좋았었다. 부엌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에 얼굴에선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매운 연기에 눈이 매워도 그냥 좋았다. 멍하니 불길 속에 눈길 한번 주다 엄마 얼굴 한번 보다 했다. 
 

 다 탄 벌건 숯을 꺼내 동그란 두덕을 만들어서 그 위에 삼발이 걸치고 두터운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끝없이 잰 손길을 놀리던 울 엄마.
촌아낙답지 않게 긴 속눈썹에 쌍거풀진 맑은 눈을 가진 울 엄마 모습이 정말 환상적으로 이뻐보였다. 고개 약간 숙이고 뭔가에 몰두할 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라고 했던가. 그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엄마가 입고 있던 잔잔한 꽃무늬 몸빼는 늘 가난에 지친 모습이었다. 얼마나 입었는지 무릎 있는 곳은 아예 닳아서 그림이 없어질 정도로 얇은 실만 남은 바지. 그 땐 속으로 늘 울먹울먹 그랬다. 내가 빨리 커서 울 엄마 저 몸빼를 이삔 걸로 새로 사줘야지...자꾸만 엄마를 보면 슬퍼졌다. 얼굴에 뭐 묻었냐고 묻는 엄마에게 씨익 웃으며 "히, 울 엄마가 너무 이뻐서.." 하면 "원, 싱겁기도.." 하시면서 내 입에 뜨거운 전을 호 불어서 쏘옥 넣어주셨다.
혀를 내밀어 날름 받아 먹으면서 "우리 엄마 속눈썹 숱이 정말 되게 많네"하면
"엄마 눈썹 문둥이 눈썹 되도 좋으니께 누가 이 눈썹 몽땅 뽑아가고 돈이나 한자루 주면 좋지. 내 새끼덜 좋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주게.." 하시면서 이슬같은 웃음 물던 엄마.
 

 우리가 실컷 배부르고 나면 엄마는 고단한 몸 좀 쉬면 될 것을 그 시간이 너무 아까왔는지 또 다른 요술작업에 돌입하셨다. 달달달 발을 열심히 굴리고 손으론 요리조리 천 조각을 돌리면서 열심히 부라더 미싱기 앞에 앉아 이쁜 보자기도 만들고 베갯잇도 만들고 땡땡이 천으로 근사한 반바지도 만들어 내셨다. 따로 교육을 받으신 것도 아니고 단지 미싱기 사용법만 겨우 익혔음에도 눈대중으로 만들어 낸 우리들의 옷은 맞춤옷처럼 근사하게 들어맞았다. 
 

 아직도 친정에 가면 그 재봉틀이 고스란히 세월을 등에 진 채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다. 저거 좀 갖다 내다 버리라니까 질겁을 하신다. 하긴, 그건 우리 엄마가 시집와서 처음으로 돈주고 산 소중한 당신만의 첫 물건이니까. 
 오늘 저녁에는 간단하게 부침개 부쳐서 못하는 술이지만 신랑이랑 대작 한 번 해볼까 싶다. 까짓거, 설사 취해서 내가 울음을 놓든 주정을 하든 그거야 다음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