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에 가니 벌써 여름이 지천이다.
복숭아에, 살구에, 자두에, 옥수수까지 없는 게 없다.
붉은 빛을 띄는 황금빛 토실토실한 자두가 눈길을 잡는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반을 쩍 갈라서 한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시큼 달달한 내 어린 날의 한 귀퉁이가 살아날 듯 유혹의 손짓을 한다.
울 엄마를 꼭 닮은 할머니로부터 살구 한 소쿠리를 건네받으며
불룩해진 장바구니 보다 마음이 더 배부르다.
예전에 우리집 담 한쪽 옆에는 두엄더미 때문인지
유달리 실하게 달리던 살구나무가 있었다.
한길가에 있던 우리 집은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의
중간 집합지이자 여름 날 평상 밑 시원한 물 한대접의 휴식처이기도 했다.
한창 태양이 위세를 떨치는 여름날이면 한 번쯤은 발을 쉬는 우리집은
그래서 많은 아이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먹거리가 부족했던 그 때의 유실수란 대놓고 허락한 주전부리이기도 했다.
그러니 늘 오가며 살구나무의 열매가 커가는 걸 눈에 넣은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익기만을 기다렸을터였다.
어느 여름날.
입맛 다시며 쳐다보던 아이들이
울타리 밖에서 살구나무를 향해 신발을 던지기 시작했다.
후두둑 살구가 울타리 안팍과 두엄더미로 흩어져내렸다.
우-몰려들어 살구를 집어 입에 넣고 볼이 불룩해진 아이들은
여름처럼 싱싱한 웃음을 물었다.
그런데 문제는 두엄더미에 떨어진 신발이었다.
신발은 찾아야겠는데 우리집 마당에는 아버지가 떡하니 평상위에 버티고 앉아
녀석들의 작태를 느긋한 담배연기로 지켜보시고 계셨으니 __
아이들은 담밖에서 작은소리로 나를 불러대며 난리지 ,
아버지는 꿈쩍도 않고 돌아가는 양을 저울질 하고 계시지,
중간에서 어쩔까나 애를 태우며 담과 마당사이를 왔다갔다 하던 나는
고만 눈물을 찔끔거리고 말았다.
결국은 마당으로 고개 쏙 떨구고 들어온 아이들이
"먹고 싶으면 떳떳하게 들어와서 한주먹씩 달라 그래지,
사내녀석들이 그넘의 고추달고 그만한 배짱도 없어서 뭣에 써먹을낀데~~"
하시는 아버지의 호통을 듣고서야
슬금슬금 신발 줏어들고 냅다 달아났다.
뒤에서 살구 따먹고 놀다 가라는 아버지 말씀은 저만치 길바닥에 내팽겨치고
죽어라 내빼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울음 끝에 낄낄거리고 웃던 나만
아버지께 괜한 퉁박을 맞었다.
다음날 학교가는 길에 아버지가 자두를 한 소쿠리 들려주시면서
선생님께도 갖다드리고 친구들한테도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하지만 전 날 아이들을 보고 웃어제끼던 미안함이 부끄럽고 창피해
왜그리도 그 소쿠리를 들고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었는지..
"씨이, 그러게 왜 어제 아들을 혼내뿌랬나...가만 놔뒀으믄 내가
챙피하게 이런거 안들고 댕겨도 됐을틴데.."
있는대로 입을 삐죽이며 낑낑대고 학교에 가니
먹을 것 앞에 장사없다고 전날의 서운함들은 다 어디로 팽개쳤는지
우와~ 함성을 지르며 삽시간에 달려들어 소쿠리를 비워내는 것이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아침에 먼길을 들고오느라 아팠던 팔이
한 순간에 싸악 낳는 것 같았다.
세월은 마당의 살구나무도 데리고 간 건지
어느 날인가 흔적도 없이 베어져 버렸다.
그러나 기억만은 오롯이 남아서
오늘처럼 재래시장에라도 갈라치면 문득 맞딱뜨린 과일전에서
발길을 멈추고 추억을 들여다 보게 된다.
살구는 양쪽으로 좍 가를 때의 그 첫느낌이 참으로 오묘하다.
순결한 처녀의 속살을 보는 듯 부드럽기도 하고,
막 목욕을 끝내고 뽀송뽀송해진 아가의 살냄새를 맡는 것도 같고,
사랑하는 사람과 첫 키스를 할 때의 달콤함처럼 아릿한 설레임도 함께 한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소중한 느낌들이 참으로 많지만
어린 시절 순수한 시간들을 채색한 대상을 만나게 되면
그 시간으로부터 자신이 얼마나 많이 떠나왔는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현재 발 딛고선 길 위에서 가끔은 주저앉고 싶을 때
죽어라 오르는 육교의 계단 중간 어디쯤에서 지는 노을 등지고
서러워말고 재래시장에 한 번 가보기를 권하고 싶다.
더도 덜도 않은 삶들이지만
신산한 살이에 그래도 잉여의 몫을 향해 열심히 달리는 열정과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선물처럼 덤으로 얹혀져 오는
인정의 손길들이 있기 때문이다.
집을 향해 오면서 씻지도 않은 살구를 하나 입에 넣어 본다.
예전의 그 맛은 분명 아니지만 입안 가득 들어차는 달콤한 추억에 마냥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