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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소원


BY 최지인 2005-07-08

<어머니의 소원>

 

  아들녀석이 숙제를 해야 하는데 엄마의 도움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란다. 요즘 초등학교 숙제는 태반이 엄마 숙제라 그런가보다 하고 아이의 책상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는데 이건 처음부터 사람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단어였다. <우리 어머니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정리해 와서 발표하기. 라고 적힌 문구....

 이 세상에서 '어머니'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눈물 짖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꼭꼭 마음을 여미어도 결국에는 뭉클한 그리움의 강으로 다가와 넉넉하고 따스한 그 품에서 한바탕 넋두리를 늘어놓고 코 한번 팽 풀고 나면 다시금 세상을 헤쳐나갈 힘이 생기곤 하는 넓은 자리.
 그랬다, 아이의 숙제 때문에 내 소원에 앞서 떠올린 나의 어머니의 소원은.

 어머니는 평생 세 가지의 큰 소원이 있었다고 하셨다.
 장터에 나가신 외할아버지께서 술 한잔에 앞 뒤 가릴 것 없이 떠넘기듯 혼처자리를 정하고 시집오던 날,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던 구불구불한 산길이 꼭 자신 앞에 버티고 설 지난한 삶의 여정인 것 같아 제발 이 길이 빨리 끝났으면 속으로 기도하고 기도하셨다 한다.

 

 짐작했던 시집살이였지만 시집 온 첫날부터 시작된 어머니의 고된 삶은 한창 곱게 피어나야 될 이십대를 <뜨끈한 아랫목에 등 짝 한 번 착 붙이고 늘어지게 실컷은 아니어도 그저 한식경만 곤히 자보는 게 첫 번 째 소원>이도록 만들었다 한다. 그 많은 대식구의 끼니 준비와 끝없는 집안 일에다 논으로 밭으로 정신 없이 일하셔야 했고 다들 단잠에 든 밤에 당신은 천근만근으로 내리덮는 눈꺼풀을 애써 밀어 올리며 그 많은 식구들의 바느질로 앉은 채 끄덕끄덕 졸다 그을음 이는 등잔불에 뿌지직 머리 지지고 어느 순간 바늘에 찔려 화들짝 놀라 허리 곧추 펴시다 보면 어느새 밖에는 희뿌연 새벽이었다는 어머니.
"또 하루가 시작된다는 게, 또 날이 밝는다는 게 너무도 원망스럽더구나. 그땐 그저 엉덩이만 땅에 대면 나도 모르게 잠이 쏟아져서 밭두렁에서 김을 매면서도 혼자서 까무룩 하다가 스스로 놀란 적도 많았어야...혹시나 누가 봤을까 얼마나 창피하던지..."
모든 걸 뛰어 넘은 어머니가 잔잔하게 그때를 돌아보시며 심경을 털어놓았던 말씀이다.

 

 내 땅이라고는 한 뼘도 없는 가난한 살림살이에 많은 식구의 밥상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당신은 늘 부뚜막에 한쪽 엉덩이만 겨우 걸치고 급하게 몇 술 남지 않은 보리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삼키는 것으로 주린 배를 달랬던 그 때, < 단 한 번이라도 방바닥에 질펀하게 앉아 하얀 쌀밥을 원 없이 먹어보는 게 두 번째 소원>이셨다고 한다. 그랬기에 너른 길을 갈 때 눈앞에 보이는 모든 논, 밭이 온통 서러움이었다는 어머니는 일부러 길만 내려다보고 죽어라 걸음을 재촉했었다고......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늘 개천에서 용 났다던 당신의 희망인 오빠가 장성해서 사 드린 바둑판같은 논 앞에서 이미 늙은 어머니는 털썩 주저앉아 한없이 울다가 웃다가 하셨다.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뱃구리가 두둑하니 밥을 먹어야 혀. 그저 밥 잘 먹으면 그게 바로 보약이제. 보약이 어데 따로 있겠냐?"
딸네 집에 다니러 오셨다가 밥투정 심한 손자를 보시며 하신 그 말씀은 모든 게 넘쳐나는 요즘의 세태를 꼬집은 당신만의 표현이었으리라.

 

 가난하고 힘든 삶의 여정 속에서도 하나 둘 태어난 자식들이 커가면서 아침마다 일렬로 늘어서서 없는 돈 내 놓으라고 손 내밀 때는 차라리 까맣게 탄 당신 속을 확 까뒤집어 보이고 싶었다는 어머니는 부지깽이를 뒤흔들어 쫓아내다시피 떠밀어 보낸 자식들이 축 처진 어깨로 눈물 닦으며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이 낳은 자식들, 제발 당신 생전에 모두 무사히 교육시켜 시집 장가 보내고 당신의 눈을 감는 게 세 번째 소원>이셨다 한다. 자식들이 빈손으로 울며 학교에 갈 때마다 그 몇 배의 아픔으로 더께를 더해 지금도 손에 잡히는 덩어리로 남아 있는 우리 어머니......
"옛날에는 낳아 놓으면 지들이 알아서 스스로 컷제, 뭐 요새 아들처럼 그리 요란스럽게 키웠다면 하나도 끝을 보기 어려웠을끼다. 세월이, 그저 세월이 니들을 저절로 키워주더구나".
당신의 눈물겨운 희생을 먹고 자란 우리들을 대견스럽게 훑어보시며 끝까지 자신의 드러냄을 겸손으로 빚어내시던, 올곧은 삶의 본보기를 우리 형제들 가슴에 올올이 심어주신 어머니. 자식들 다 출가해서 가정을 이루고 제각각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앞세우고 떠들썩하게 집에 모여들면 손주들 재롱에 연방
"아이구, 내 새끼들. 아이구, 내 강아지들....."을 입에 달고 사시는 어머니는 손주들을 하나하나 눈에 심으며 이젠 당신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었노라, 이만하면 당신은 축복 받은 생을 살았노라 마냥 행복해 하신다.

 

 그런 우리 어머니께 요즘 새로운 소원이며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야야, 이젠 그저 이 늙은이 느들 애 먹이지 말고 자다가 자는 듯이 저 세상으로 가야 할낀데......그기 내 마지막 소원이구나".
우리 어머니, 슬프도록 아름다운 우리 어머니. 어쩌면 이 시대의 모든 어머니일 수도 있는.

아이의 숙제장에 내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 아주아주 먼 훗날이었으면 좋겠다는 내 소원을 적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