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산책
 

 누군가를 향해 피워 올리던 오랜 그리움이

간절한 언어가 되어 파란 싹으로 돋아나는 계절, 봄.

연둣빛 풀잎을 즙내어 뿌린 것 같은 봄 향기가 사방에 지천이다.

세상 모든 뿌리들이 소생해서 희망의 꽃눈들을 틔우기 시작한다.

우리네 인생의 가지에도 따뜻한 봄의 햇살은 더하고 덜함이 없이 골고루 찾아든다.
 

 그러나 아무리 봄날의 햇빛이 세상에 가득해도

마음 안에 햇빛이 가득하지 않으면 아직도 봄은 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설렘으로 집을 나서 보는 봄날의 산책은 자연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보려는 인간의 서툰 몸짓인지도 모르겠다.
 

 새로 돋는 이파리 위로 내려앉은 봄빛을 느긋하게 바라보다가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봄나물을 캐는 몇몇의 젊은 아낙네들과

그 주위를 뛰어다니는 올망졸망한 아이들에게 문득 시선이 가 닿는다.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를 따라 햇살이 빗살무늬처럼 해체되어

머리카락이며 어깨 위에서 부서지는 모습이 동화책 속의 풍경처럼 아름답다.
 

'나도 나물 캘 도구를 챙겨서 나올 걸 그랬나...?'
아쉬움을 멀찍이 물러서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달래 본다.  

 둑길에 주저앉아 습관처럼 늘 지니고 다니는 작은 시집을 펼쳐 본다. 그

러나 이미 봄 햇살에 빼앗긴 마음은 자꾸만 곁눈질의 변주를 시작하고

집중해야 할 시선은 자신의 본분을 잃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고집스레 버티고 앉아 있는 이유는 뭘까. 그

네들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에 예쁜 그림을 새겼듯

내 모습 또한 봄날이 불러오는 예쁜 그림의 한 부분으로 비춰질 수 있지 않을까란

어리석은 변명이었을 수도 있겠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의식적으로 붙잡고 얼마나 있었을까.

우르르 뛰는 발자국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엄마 주위를 뛰놀던 녀석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려다본다.
 "아줌마, 아줌만 왜 봄나물 안 캐는 거예요?" 하는 물음이 다소 도전적이다.

뭐라고 말해주어야 요 녀석들을 재미있게 해줄 수 있을까

짧은 순간에도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다 응수한 말은 고작
 "응, 아줌만 다음에 캘 거야... 지금 아줌마가 같이 캐면

너희 엄마들이 캘 나물이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니?"라는 답변이었는데

옆에 있던 상급반쯤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서 금방 되돌아오는 말이 걸작이다.
 

"아아 알았다. 아줌만 지금 책 속에서 봄을 캐고 있는 거구나~?"
 "햐, 고 녀석..너, 도대체 몇 학년이니?"
똘망똘망한 녀석의 눈을 감탄하며 들여다보는데

이젠 아예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술 더 뜨는 말.

"있잖아요, 아줌마. 우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요. 자연이 숨을 쉬고
얘기를 걸어올 때는요, 그냥 그 얘기를 들어주어야 한대요. 우리에게
자연의 사랑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도 자연을 친구처럼 잘 돌봐 주어야 한대요.

그러니까 아줌마도 이 책 보지말고 자연이랑 말도 하고 사랑도 해 주세요"

짐짓 은근히 권유하기까지 한다.

'아, 이즘 학생들은 이리도 생각이 앞서가는구나'. 싶은데
"맞아요, 책 속에 있는 봄보다 우리처럼 뛰어 놀면서 직접 느끼는 봄이
더 좋은 거래요...자연은요, 그냥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고 했어요" 또 한 녀석의 말이다.

때묻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다.

그러니 그런 녀석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가관이었을까.

정통으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하다.
 

아이들에게서 그 어떤 철학가보다 심오한 정신세계를 들여다 본 듯하다.

요즘은 아이들이 똑똑하기도 하지만 학교의 기초 전인교육이

실효를 거두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리라.
 

얼얼해진 정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 달라 보인다.

가만히 나의 모습을 짚어 가며 반성해 본다.

당장 눈으로 보여지는 겉의 모습보단 자연의 내밀한 소리에

언제 한번 귀기울여 본적 있었던가. 언제 한번 하늘을, 별을, 달을,

진정 거짓 없는 마음으로 가슴 가득 담아본 적 있었던가.

그저 어줍잖은 언어의 치장을 한껏 과장으로 부풀려 놓고

그것이 곧 자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듯 과시하듯 떠벌렸었을 뿐.

참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렇다. 우리는 많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들 내겐 남과는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다고 자신하면서도

정직한 눈으로 들여다보면 빈 쭉정이만 남은 가난한 마음이

먼지를 폴폴 날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벼워진 영혼으로 무거워진 소유를 끌고 가는 우리들이기에

정신의 무게마저 거느리기엔 많은 버거움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유를 가볍게 해서라도 영혼과 정신의 무게는 부피가 커져도 좋으리라.

그 정신의 커다란 창고에 이 아름다운 봄날의 향기와 풍경을 꽉꽉 채워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교감을 향유하는 날들이었으면 좋겠다.
 

먼데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들판을 배경으로 파란 하늘에

뭉게 구름 몇 점이 점점 뚜렷해지는 능선을 넘고 있다.

세상이 온통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