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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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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같은 딸, 딸 같은 엄마


BY 최지인 2005-04-02

누가 역할바꾸기를 강요한 것도 아닌데

가끔은 그런 착각을 할 때가 있다

 

딸 애는 묘한 데가 있는 아이다

'도대체 저 아이 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증폭하는 궁금증이 점점 또아리를 튼다 싶으면

'그래, 니가 그렇지 뭐..내 기대가 괜한거였지' 싶게 만드는.

그렇게 한 두숨 몰아쉬고 나면

다시 '아니, 아니야..쟨 역시 뭔가가 달라' 싶게 한다.

 

요즘 다소 황당스런 일을 계속 겪는다

시험을 보았는데 과목간 점수가 널뛰기가 심해

걱정이 한껏인 엄마와는 달리 태평인 딸애

"호홍,,^^* 뭐, 점수가 밥 멕여줘..사람 됨됨이가 밥 멕여주지.." 

분명 저건 예전 점수가 안나왔다고 이불 뒤집어 쓴 딸애한테

내가 위로삼아 해준 말이었는데..

 

그 땐

" 그래도, 나 속상하단 말야..공부한 것에 비해서 점수가 너무 안나왔단 말야" 

하면서 도리어 소리를 빽 내지르더니만.

 

TV를 보면 요즘 아이들이 즐겨 보는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라

아빠 옆에 앉아서 <인체의 비밀>,<생로 병사>,<한의학 정보>같은 프로를 즐겨보다가

어떤 병의 증상이나 설명이 나오면 큰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저건 엄마랑 똑같은 증상이다,

이건 아빠랑 똑같은 증상이고, 저건 동생에게 해당된다는 둥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에 스스로 의사도 되고 처방전도 내린다

 

같잖아서 피식 웃다가도

쟤가 벌써 저렇게 식구들을 챙길 때가 되었나 대견하기도 하고

내가 해야 할 잔소리를 대신 해주니 고맙기도 하고

한편은 내 자리가 위태한 것 같아 당황스럽기도 하다

 

얼마전에는 인터넷 쇼핑을 열심히 들락거리더만

건강에도,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지압 슬리퍼를 사주기도 하고 

자기 눈앞에서 안 신는 걸 보면

"엄마, 사줘도 안 챙겨 신어? 아예 밥도 떠먹여 줘?"

ㅋㅋ..이거 내가 야단치던 꼭 그 모습 그대로 구박으로 되돌아 온다

 

지난 일요일에 또 하나 사건을 만들어냈다

여름부터 부지런히 용돈을 모으기만 하던 딸애의 또 하나의 작품이다

(방방에 있는 돼지까지 모조리 잡아가면서 정말 극성이었다)

가을 한가운데 있는 일요일을 그냥 지나갈 수 없었던 아빠 엄마는

둘만의 오붓한 갈대밭 여행을 떠났고

 

이때가 기회다 싶었을까, 딸애는 한창 세일에 들어간 백화점에 갔었나 보다

자신의 입장으로서는 꽤 큰 거금을 들여 아빠 옷을 두개나 사왔다.

물론, 남편의 입이 귀에 걸린 건 당연하다

눈썰미도 있고 미술 디자인 쪽에 남다른 재간이 보이는 터라

옷이 남편의 마음에 쏙 들었을 테고..웃는 얼굴에 눈물까지 글썽이는 남편.

내가 사는 옷은 늘 마음에 안든다고 투덜대던 양반의 저 표정이라니..!!

슬그머니 치미는 감정...흐~~'말도 안돼, 질투다.

 

턱없이 감동하는 남편 따라 덩달아 눈물이 고여 슬그머니 돌아서니

딸애는 그걸 엄마 게 없다고 섭섭한 감정을 보이는 걸로 착각했나 보다

"아유, 삐질이..내가 못살아요, 엄마 거는 마음에 드는 게 있긴 한데

너무 비싸서 할 수 없이 포기 했다 뭐. 그 대신 엄마랑 보려고 영화 표 예매해 왔어.

속상함 풀어, 알았지..?".

'아구야...저 여우..쟤 정말 내 뱃속에서 나온 애 맞아?'

 

공부 잘하는 딸애를 기대했다가

이젠 그 기대에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쪽으로 전환할 때

내 못난 자존심 때문에 참 많이도 속상했었다.

이젠 그런 아쉬움 따윈 잊어버리기로 했다.

저렇게 식구들 하나 하나 따사롭게 챙기는 아이라면

훗날 어떤 일을 하건 어떤 상황에 처하던

슬기롭게 대처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또 한번 스러져가는 가을이 쓸쓸하지만은 않은 것은

요즘 내 마음 속을 꽉 채워 주는 그런 따스함들이 있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