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인 듯 이젠 얼굴마저 가물가물
기억에서 먼 외할아버지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그 새 얼마나 울었는지 여든 여덟 아버지를 보낸 예순 넷의 목 쉰 엄마는
그러나 딸네의 새벽잠을 깨우는 것이 당신의 슬픔보다 더 염려스러웠던가 보았다.
자다 말고 전화를 받는 내 목소리 또한 가라앉아 있었지만
엄마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였다.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듯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무거운 공기가 전해져 와 할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슬픔에 앞서
'저러다 우리엄마 몸져 누으면 어쩔까나' 먼저 애가 쓰였다.
아이들 문제도 있고 부산에서 강릉까지 하루만에 갔다 올 수도 없다는
핑계를 대고 얼마간 조의금을 송금해 드리는 것으로 내 의무를 엄마에게 떠넘겼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런 건지 눈앞에 안 보인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 날 하루는 차분히 가라앉은 기분이었는데 다음날부터 곧
조심스럽지만 내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일주일이 지난날이었다. 강릉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쉰 목소리에 간간이 기침까지 하시면서 맏이라는 기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가 많다고......
당신 자신을 자책하는 말이건만 찔리는 건 바로 나였다.
언제나 먼 거리를 이유로 전화 한통의 입발림으로 맏딸의 의무에서
벗어나곤 했던 나였으므로... 바람소리 같은 엄마의 긴 한숨소리를 들으며
훅 속으로 들이쉰 숨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야야, 내가 간땡이가 부었댔잖너. 아 글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며칠 전부터 하두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내가 전에 야채 팔던
시장에 가서 앉아 있었잖너.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에
거게로 나를 찾아오셨드랬잖너. 그리드니 뜬금읎이 내 손에 돈을 십만원이나
쥐어 주시민서 기양 아뭇소리 말고 무조건 집어 넣으래잖너. 내가 너를
술 한잔에 떠 넴기듯 가난한 곳에 시집을 보내서 지금껏 죄가 됐었다구...."
"참 희안도 하네요? 어떻게 전날 그렇게 멀쩡하던 노인네가
다음날 운명을 달리할 수 있어요 그래?"
"아 ,그러니 노인 되믄 밤새 안녕하싯나고 아침마덩 인사를 안 하드나.
그러고 오래 살다 보믄 자신이 가는 날은 아는 사람도 더러 있다구두 하더라만..
느 할아버지도 그 날 엄마보고 내 이제 오래 살 만치 살았고
자꾸 마차가 보인다고 하시더라".
"예? 어머나 세상에 정말이예요? 별일이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온몸에 좍 소름이 돋았다.
엄마는 아버지가 주신 돈을 받기만 하고 정작 아버지께
따뜻한 밥 한끼 억지로라도 사드리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또 자책하셨다.
그래서 필경 쌈지 돈을 털었던 듯 몇 번을 접고 또 접힌 자국이 있는 그 돈을
다리미로 하나 하나 펴서 고이고이 간직할 거라고 하셨다.
삼오제도 지내고 마침 할아버님의 생신까지 겹쳐서
첫 제사 모시듯 예까지 차리고 집에 오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니
초로의 일흔 노인이 맏사위 노릇하시느라 파김치가 된 듯 겨우 대답만
하시는 거였다. 이상했다. 부음을 받고도 멀쩡했던 눈물샘이
그예 펑펑 솟아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고생...많으셨지요?"
겨우 그 말 한마디만 하고 들고 있는 수화기로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는데
내 마음을 눈치채신 아버지가 힘들게 말씀하셨다.
"야야, 왜 우너... 이 애빈 괜찮다. 느 에미가 고생했제...
힘들기 뭐이 있너? 나야 그저 자리만 지키다 왔능기...너무 마음 끓지 말어...
산다는 기 뭐 벨기너? 다 그렇게 한세상 살다 가는 기제....
오야, 내 쪼매 쉬었다가 느덜 에미랑 느 집에 한 번 내리 갈란다.
그저 여다 자주 기벨이나 하거라. 애비가 벤벤치 못해서 전화하기도 숩잖트라..."
그리도 한 번 유하시러 오시라 사정하다시피 해도
"내 움직꺼리믄 느덜 애만 멕이지...아, 앞에 깔린기 창창한 날인데
뭐시 그리 급할끼 있나...사람은 서루 지달리는 맛도 있어야 하지 않겠너...."
하시며 한껏 여유를 부리던, 그런 우리 아버지가 자청해서
딸네 집에 내려오시겠다 하셨다.
보이게 약해지신 아버지...
큰 일을 치르시면서 당신 마음에 받은 충격만큼이나
심적 변화 또한 컷던가 보았다. 괜히 서두르는 모양이 내겐
또 다른 슬픔의 무게로 다가왔다.
할아버님을 보낸 엄마의 회한의 눈물...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나의 눈물...
서로의 눈물은 어떤 색깔일까?
비록 그 물기의 색깔은 서로 다른 농도로 흘러내리겠지만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뿌리를 향한 그리움을 쏟아내는 것임은 자명한 진실이리라.
얼마 안 있으면 행주를 하얗게 폭폭 삶아 널어 주시며
"야가 살림살이를 메렌읎이 살어야. 그저 집안은
여자가 움직기리는 데 따러 반짝반짝 윤이 나고 살림도 이는 벱인데".
하시며 잔소리를 입에 달고 계실 엄마와
"아, 시방이 멫 신데 여적 눈들을 안뜨고 있너? 허리도 안 아프너?
벌써 해가 중천이구마".
하시며 새벽 댓바람부터 활짝활짝 창문을 열어 젖혀 온 식구들의 단잠을 깨울
아버지를 우리 집에서 뵐 수 있을 거란 기대로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다.
하긴, 오시자 마자 하루 주무시고 아덜 애멕인다고 고집부리며
올라갈 궁리부터 하실 당신들이지만......
늦지만, 아주 늦게 깨달았지만
당신들께서 살아 계심이, 그래서 작은 효도나마 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음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비록 며칠 간의 머무름이 당신들에겐 또 다른 마음의 짐일지라도
나에겐 그 동안의 불효를 조금이나마 씻어낼 수 있는
유일한 면죄부의 길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