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문예대회에 내려고 한껏 심려를 기울려 쓴 글이다.
지금 읽어보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래도 내 인생의 한부분이다 싶어 부끄럽지만 올려놓는다. 첨삭없이.
최소한 이 글은 그 때의 내 편에서는 최선의 진실이었으니까.
낮엔 눈 감고 죽은 시체마냥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이웃한 가로수나 물찬 제비마냥 매끈하게 다듬어진 놀이터 귀퉁이 돌은 오늘도 실쭉거린다.
“덩치나 작나, 키만 멀 대같이 커 가지고. 자리만 큼직하게 차지하고 사람들 다니는 데 방해만 되고 말이야. 태양은 하나라도 저렇게 넓은 세상을 환하게 채우건만, 여럿이 일렬로 쭉 서서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철따라 옷을 갈아입으며 사람들의 눈을 현란하게 하는 가로수나 놀이터 울타리에 불과하면서 아이들이 밟고 장난친다고 놀이 기구마냥 날뛰는 모퉁이 돌은 자기들만 인간들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만, 아마 내 얘기를 들으면 입이 쑥 들어갈걸. 자기들 자는 밤에 내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는지 들으면 말이야.
어스름한 어둠이 아파트를 넘어 도시로 잦아들면 나는 희뿌연 밤안개를 일으키며 일을 시작하지. 작열한 한낮의 열정을 뿜어대던 태양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면 인간들은 이내 나를 향해 아우성을 치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빛이 필요하다.’고.
신이 주신 시계를 무시한 채 나를 불러대는 인간들이 얄밉지만, 소란스러움이 싫어 얼른 어두움의 한가운데로 얼굴을 내민다. 그제야 인간들은 기세등등한 태양에 억눌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희뿌옇한 나의 불빛 아래서 짙누렇고 악취가 나는 깊은 속내를 풀어헤쳐 보이지. 땅에 붙어있는 그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움직이는 모양을 보면 사연이 참 많아 보여.
술에 몸을 싣고 갈 짓 자로 일렁이다 나와 부딪혀 쓰러지는 사람, 내가 치기라도 한 것처럼 욕에 삿대질까지 해대며 달려드는 사람. 그래도 이런 사람들은 봐 줄만해. 공격적으로 나온단 말은 아직 힘이 남아있다는 거 아니겠어. 그런데 올라오는 슬픔을 짓누르며 꾸역꾸역 집어 삼켰던 눈물을 토해내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내 발등에 엎어져 어깨를 들썩이는 사람, 서 있기조차 버거워 간신히 기대어 있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심란해. 곧 거꾸러져 죽을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이거든.
처음엔 참 이해가 안 되더라. 태양 아래의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 자기들만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양 큰소리 쳐 대잖아. 어리 숙한 내가 가까이 하기엔 주눅이 들만큼 말이야. 그런데, 그런 인간이 어느 날 너덜너덜한 걸음으로 오더니 내 앞에서 푹 쓰러지는 게 아니겠어. 처음에는 ‘우연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었는데, 불쌍하게 쓰러지는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나중에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얼마나 힘들면 말도 안 통하는 나에게 와서 쓰러질까. 인간들끼리는 이 상처를 꺼내 보일 수 없나? 나에게조차도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진짜 마음을 까발릴 수 없는 걸 보면 지독스레 속이 추운가봐.’
그 이후로 나는 인간을 친구로 받아들이기로 했지. 그들의 말인 즉 슨 ‘태양 아래서는 우린 가면놀이를 해. 퍼붓고 싶은 욕설은 목구멍까지 차 올라와도, 금방 맑은 시냇물에서 건져낸 빤질빤질한 예쁜 조약돌 같은 말만 하면서 살아.’하고 넋두리를 하더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고개는 끄덕끄덕했어.
그 때부터 인간들은 밤마다 어슴푸레하고 희멀건 나를 불러 놓고는 편한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네 멋대로 행동하더라. 심지어는 내 다리에다 대고 오줌까지 내 까리는 거 있지. 인간들과 친하면서 화가 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지 뭐. 낮에는 삶의 전쟁이 너무 바빠 자신의 상처랑은 발로 꾹꾹 밟아 구석에 쳐 박고, 밤이 되면 그 상처들이 뒤얽혀 영문도 모른 채 복받쳐 오는 불덩이를 어떤 이는 술로, 어떤 이는 욕설로, 어떤 이는 눈물로 달래가는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도 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온 밤을 그렇게 떠들며 울며 웃으며 지새우는 모습을 두고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더라. 그렇다고 내가 뭐 친구로서 대단한 위로를 해 준 건 없어. 밤이면 항상 이 자리에 서 있었고 그들이 찾아와서 하는 대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지.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아득했고, 섣불리 말을 했다간 인간들의 넋두리가 더 길어질 것 같아 관뒀지 뭐. 정말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안 좋은 얘기를 계속 듣고 있으려니 그들의 짐이 내 머리 위로 하나하나 옮겨지는 것 같고, 발에는 그들이 토해낸 오물로 냄새가 장난이 아니더라. 그래도 어쩌겠어. 친군데. 그 많은 설움을 다 쏟아낼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지.
도대체 그들이 쏟아내고 또 쏟아 낸 건 무엇이었을까? 강자 앞에서 어거지로 삼켜야 했던 고집?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 억지로 내 놓아야 했던 욕심? 아니면, 하고 싶지 않았던 더러운 아부? 굴욕감?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모르겠어. 옆에서 보고 있기가 딱 할 정도야. 그냥 솔직히 흰 건 희다고 검은 건 검다고 하면 안 되나? 뭘 위해 그렇게 가면을 쓰고 사나? 밤에 저렇게 힘든 걸 보면 자기들도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사실 이런 얘기 인간들에겐 잘 못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릴까봐. 아마도 태양은 꿈에도 모를 거야. 밤에 인간들의 모습을. 어떤 것이 내 친구 인간들의 진짜 모습일까? 지금껏 옆에 있었지만 나도 헷갈려.
삶의 찌꺼기를 나에게 다 쏟아 붓고 난 후 인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철저히 안면몰수하고는 자기네 집으로 돌아가 버려. 아침엔 말짱하게 돌아다니는 인간들을 보면 정말 어제 그 사람들이 맞나 싶고 소름이 끼친다니까. 아는 척도 제대로 못해. 인사라도 하려고 하면 쌩 하니 찬바람이 불 정도로 빨리 지나가 버리거든. 어제 밤 자기들의 모습을 인정 안하고 싶고 지우고 싶겠지. 그들의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어떨 땐 배신감이 들기도 해. 인간들이 너무 바빠 내 말을 못 믿는 가로수나 돌 앞에서 증인이 되어 주지 않았을 때는 정말 화가 났었어.
그런데 너는 왜 인간들과 친구하냐고? 인간들이 나에게 보여 준 모습이 가면을 벗은 가장 진실한 모습일거니까. 그 모습을 보여 줄 친구로 나를 택해 주었으니까. 나라도 없으면 그들은 더 외로워 질 테니까.
그들을 연민하는 친구로서 내가 매일 하는 일은, 인간들이 허깨비 옷을 입고 방황할 동안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 거야.
자기 욕심에만 매달려 헤매다 영영 돌아올 수 없을까봐, 멀리 길 떠난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어머니마냥 길 가득 스물 스물 기어 다니는 어둠을 밤새 훠이훠이 쫓으면서 서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