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엄마 큰이모랑 꼭 닮았다”
오전에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읽고 있었더니 딸이 하는 말에 거울을 들여다보니 정말 언니가 거기 있었다.
가로수 은행잎이 다 떨어져 날리기도 전에 첫눈이 시작되어 날씨가 풀리면 머리칼을 다듬어야지 하고 미루다가 짧았던 머리칼이 단발머리가 되어 버렸다.
이젠 숱 없는 머리를 긴 머리카락이 보온을 해주어 잘라내어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냥 손질만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지금의 내 머리 모양에 안경을 쓰니 영락없는 언니의 모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 모습이었다.
내 마음속에 항상 새겨져 있는 우리 언니의 모습, 내가 그리워하고 본받고 싶어 하고 무척 사랑하는데 표현을 할 수 없다.
언니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짝사랑 같고,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우리 언니.
나는 우리 언니 외에 그 누구에게도 언니라고 불러 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언니 대접은 했지만 언니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사회생활 하는데 여자들과 친분을 쌓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 있다.
고쳐 보려고 해도 그 때마다 입이 열리지 않아 포기를 하였다.
내 입에는 언니라는 말이 익숙해져 있지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언니에게도 언니라고 불러 보았던 회수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면 숫자로 헤아려질 것만 같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언니는 여고를 마치고 직장을 구해 집을 떠났다.
그 후부터 명절을 무척 기다렸었다.
언니는 양손에 선물을 들고 나타났었으니까. 그 때부터였다.
내 마음속에 우리 언니 외에는 누구에게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던 연유가.
어린 마음에, 머나먼 곳에서 많은 귀성객들 틈에 끼어 선물을 들고 집에 다니러 와서 겨우 이틀정도 쉬고 다시 가야 하는 언니의 모습을 보며 많이 슬퍼했었다.
우리 언니가 집을 떠나 살 수 밖에 없도록, 시골 그 많던 논밭과 과수원까지 사업 실패와 주색잡기로 탕진해 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며 언니를 불쌍해했었다.
그렇게 일찍부터 언니와 헤어져 살아오다 보니 언니와 잔정이 붙지 않아 대하기가 어려워졌고, 언니의 기둥이 내게는 너무 높게만 보여 지게 되었다.
그리고 언니가 결혼하고 살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도울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아팠던 것이 깊게 남아 있어서 언니를 위하는 마음에서였을까?
우리 언니를 두고 남에게 쉽게 언니라는 존칭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내 마음 안에서 우리 언니를 배신하는 행위처럼 생각되었었다.
내 평생에 달라지지 않을 고집이 있다면 딱! 그거 한 가지 뿐일 것이다.
두해 전에 남편이 큰 병으로 입원하고 항암 치료 중에 언니가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나를 제일 걱정하고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더라는 여동생의 말에 가슴이 아리도록 고마움을 느꼈었다.
나보다 더 언니는 이 동생을 사랑해주고 있었는데, 바보처럼 내가 언니에게 서먹함을 만들어 다가가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언니가 고생할 때는 마음이 아파서 감히 다가가지 못했고, 사업이 성공하여 잘 살아가기 시작 하면서 부터는 부담을 안겨 주기 싫어서 친해지려 하지 않았었다.
모두가 자매지간에도 작은 것 하나 그냥 얻기 싫은 내 못난 성격 탓 이었으리라.
이래서 형제자매는 부딪히며 자라야 오만 정이 다 드는 거라고 피부로 깨닫게 되었다.
남편의 간호 때문에 자주 만났던 언니랑 많이 친해져서 새 해의 인사를 문자로 주고받기까지 하며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꼈었다.
우리 언니를 외형이나마 닮아 가는 것도 참 행복하다.
매일 거울 속에서 나와 언니가 만나고 있으니까.
2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