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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마리 토끼들의 생일(둘째토끼 이야기)


BY 섬그늘 2004-12-15

둘째는 93년을 3일 남겨논 날 아침에 태어낳다. 

 

첫애를 제왕절개하여 낳았기에 둘째는 당연히 그 순서인줄 알았고 수술예정일도 미리 잡아놨었는데 성질급한 아이가 그날보다 더 빨리 세상보기를 원하였나 보다.

연말연시였고 의사들도 망년회로 각종모임으로 바쁜 날들이였어서 그 새벽에 수술을 맡아줄 의사를 찾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거의 한달을 일찍 태어난 아이는 2.5kg을 간신히 넘긴 무게라 담당의의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였다.  기계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세상밖에서 바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아뭏든 신생아실에 도착한 아이는 간호사가 먹이는 제양 만큼의 우유를 한순간에 다 먹어치우고는 또 먹어야 한다고 울어대어 담당간호사를 애먹였고, 의사의 고민을 순식간에 해결시켜주었다.

 

다음날 신생아실의 수간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아이 엄마얼굴 좀 봐야겠어요.  몸무게는 제일 적게 나가는데 제일 씩씩하고 똘망한 아이의 엄마가 누구인지...."

 

비록 첫애와 같은 상황이었어도 한번의 경험은 나를 많이 여유롭게해주었다.

 

힘들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두달가량 모유도 시도하였고, 아이에게 좋을 듯 싶은 책과 음식을 늘 곁에 두려고 애썼다.

 

아이는 늘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고 귀찮게 구는 오빠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환한 아이였다.

 

시어머님은 아이를 낳던날 병원에 오셨다가 나가시며 넘어지셔서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어려움을 겪으셔야 했다. 

다행히 산후조리는 옆동에 사는 친정언니와 엄마가 번갈아가며 하시기로 얘기가 되었던 터라 시어머님의 거동 불편함에 문제될건 없었다. 

 

아이둘을 돌보는 일이 내생의 전부인듯한 하루 하루가 3개월이나 흐를 동안 남편은 둘째를 안아보는 것 조차 마다 하였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늦기 일 수 였고, 시댁에 가있는 날이 많아졌었다.

두아이와 나는 잘 정돈된 일기장과 같은 일과를 행복하게 누리는 재미에 남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고도 하질 않았던것 같다.  아니 바쁜남편을 아예 가족에서 열외시켰었는지도....

 

어린이 날이었던것 같은데 백일도 그냥 지나가 버린지라 둘째에게 무언가 기쁜날을 만들어주고자 며칠을 별러서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하였는데 그날도 남편은 여러가지 이유를 대고 아침일찍 집을 나갔던것 같다.

 

십년넘게 연애하고 결혼한지 5년을 넘겼는데도 그즈음  남편의 행동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어린이날 남편은 내게 다른 약속을 핑계대고 회사총각 처녀들과 제부도로 여행을 다녀왔고 오는길에 간단한 접촉사고가 났다고 한다.  이런 사정도 며칠이 지난후 함께간 동료로 부터 안부를 묻는 전화를 통해서야 짐작하게 된 일들이었다.

그후로 남편은 가끔씩 허리통증을 표현했으나 난 그 사고의 후유증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하였다.  어쩜 마음 한편으로 고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삐걱거림이 그당시 우리부부가 풀고 넘어야할 큰 과제였던것 같다.

 

아침 저녁보는 남편의 얼굴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즈음 비로소 난 남편이 참 많이 말라있는것을 느꼈다.

내가 얘기좀하자고 할때마다 남편은 할 얘기가 없고 자기는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저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집에 늦게 오는거고 일이 많아서 가족을 챙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만 하였다.

 

둘째를 원한건 남편의 의지였는데 막상 아이가 태어난후 남편이 철저하게 아이를 무시하고 예뻐하지 않는 듯한 행동을 보였을때 내 좁은 머리로는 남편이 이해도 용서도 될 수 없는 존재였다.

주변에서 남편이 많이 말랐다고 집에 무슨일이 있느냐고 궁금해 할 즈음 난 남편의 등을 떠밀어서 종합검진을 받게 하였다.

검진결과는 정상으로 나왔고 우린 그 결과가 마치 우리가족이 정상이라고 판결된것인양 그렇게 엮어졌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같다.

아이가 우는 소리가 싫었다고 그래서 늦게 들어왔었노라고 하는 남편의 변명을 가족이 하나 더 늘어난 책임감이 그를 힘들게 했었나보다 라고 이해하기로 마음먹고나니 한결 정리가 된 기분이었었다.

 

하루하루 다람쥐 체바퀴 도는 듯한 일상이 지루해질 무렵 남편에게 병원을 꼭 찾아가야할 일이 생겼고 그 결과가 우리가족의 일생을 뒤바뀌게 하였다.

 

남편은 둘째가 14개월이 채 안된날 임파선 암으로 31살의 고단한 일생을 마쳤다.

장례식장에서, 자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난건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둘째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모두를 통곡하게 만들었었다.

 

둘째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답게 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 구별없이 잘 안겼다.  한번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다방에 앉았는데 아이가 발짝을 띄며 이자리 저자리 옮겨다니는 동안 모두에게 안기고 웃음을 웃어주어서 그 다방에 있던 모두에게 기쁜 순간을 맞게 해주었었다.

 

이런 저런 곡절을 뒤로하고 내가 아이둘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한 때는 첫째가 막 세살반이 되었고 둘째는 20개월이되었었다.

3개월동안 이러-저런 이민수속을 마쳤고 남편과 내 피땀이었던 집도 처분하였다.

 

정말 울고 불고 말리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리라는 결심하나만 가지고 새로운나라 나를 모르는 새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떠난 날도 12월의 어느날이였다. 

 

두아이의 생일들이 모두 12월 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