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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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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평에 산다


BY 하나 2004-11-22

춥다고 커튼을 다 내려놨는데 그래도 햇살은 그 틈을 비집고 방안을 환하게 비춘다.

손가락 굵기만큼의  햇살줄기엔 먼지알갱이들이 다다닥다다닥 붙어서 흘끔흘끔 나를 쳐다본다. 이래도 누워있을래?, 나를 나무라는 듯 머리 위에서 떠나질 않는다.

하지만, 모른척 게으름을 피워본다.

토요일 아침 8시부터 10시, 이때가 내겐 가장 한가로운 시간이다.

큰 아이는 학교에 갔고, 밥상을 금새 치우지 않아도 겁나지 않는다, 이른 시간이라 누가 찾아올 사람이 없으므로, 오늘따라 작은 녀석도 혼자서 부산하게 움직이며 잘도 논다.

나도 이른 낮잠을 자보고픈 욕심에 눈을 감지만 이내 작은 녀석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받는다. 녀석은 내 배 위에 털석 주저앉아 화들짝 놀라게 한다.

엄마, 잠 자지 말고 나랑 놀아달라는 뜻이렸다.

살짝 눈을 감아본다, 녀석이 눈치 채지 못하게..하지만 이내 녀석은 달려들어 아까보다 더 큰 힘으로 나를 눌러버린다.

스멀스멀 몸을 움직여본다.

창문을 활짝 열어 찬 공기를 초대한다, 무거웠던 눈 꺼풀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녀석이 재채기를 한다. 안그래도 콧물을 흘리는 녀석이다.

소아과에 가야하는데, 큰 아이를 기다려서 같이 가야한다, 두번 걸음 하지 않으려면.

걸레를 빨아 청소를 시작한다. 문이란 문은 죄 열고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내 쫒는다.

물기가 마르면 그 자리엔 늘 그렇듯 먼지란 놈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는다.

구름낀 날 보면 우리집은 반들반들 윤이 나는데, 햇살이 비치면 영락없이 청소못하는 내 실력은 여실히 드러나고 만다.

조금 게으름을 피웠더니 갑자기 바빠졌다.

걸레질하고, 빨래 널고, 작은 녀석 씻기고, 설거지하고, 그러고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작은녀석이 졸리다고 칭얼댄다. 품에 안기자 마자 잠이 든다.

그틈을 타 얼른 점심을 먹는다.

전화벨이 울린다.

"언니, 나 영숙이..오늘 언니네 집에 가도 돼?"

"응, 그래...갑자기 웬일이야?"

"담주는 김장 때문에 안될거 같고, 오늘 애 아빠가 쉬거덩...여기서 출발하면 오후 5시 넘을거 같애."

"응..그래..근데 뭘 대접하냐?"
"대접은 무슨...애 어린거 다 아는데..그냥 나가서 먹자 언니."

"그래"

전화벨소리에 작은 녀석이 깨버렸다.

두 녀석을 데리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바람은 어느새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로 황금융단을 깔아놓았다. 걸을 때마다 은행잎이 폭신하게 느껴진다.

하루종일 집에 갇혀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작은 녀석은 신이 나나보다. 잘도 걷는다.

소아과에서 너무 지체가 되었다. 손님들은 오기로 약속이 되어있고 맘이 바빠 작은 녀석을 들쳐업고 부랴부랴 집으로 왔다.

아니나다를까 현관문 닫자마자 벨이 울린다. 근처에 왔단다. 수원이니까 뭐 차만 막히지 않으면 금방일테지..

무엇부터 손대야할지 모르겠다, 치운다고 치웠는데도 헛점투성이다. 에휴...

처음 인천에 와서 알게 된 우리 여동생 또래의 동생이다.  그러고보니 한 6년만에 만나는거다. 결혼식에 가보고는 처음이다. 각자 사느라 바빠서 한 몇년은 연락도 못하고 지내다가

이제 작은녀석이 17개월 지나고 보니 내가 조금 여유가 생겨서 먼저 전화를 했었다.

다행히 전화번호가 바뀌지 않았다.

그 새 영숙이도 아들 둘을 낳아 큰 애가 다섯살, 작은 애가 세살이란다.

세월은 참 이리도 빨리 지나 뻔히 눈앞에 현재의 상황이 펼쳐지는데도 자꾸 도리질치게 만든다. 옛날 모습만 찾게 되고 말이다.

네 식구가 우리집에 들어섰다. 거실이 꽉 차는 느낌이다. 갑자기 시선 둘 곳이 마땅찮다.

잠깐 얘기를 나누다가 싱크대로 가서 젖병을 씻는다.

아이들은 넷이서 오밀조밀 모여 장난감을 가지고 그새 어울려논다.

매일매일 만났던 아이들처럼 스스럼이 없다.

나만 어색해서인지 자꾸 말이 끊긴다. 

"집은 좁고 물건은 많고...정리가 안된다. 원체 내가 정리를 잘 못하기도 하지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영숙이는

"언니, 기억나? 옛날에 언니가 나보고 좀 치우면서 살라고 했던말...요즘은 나도 청소 좀 하고 사는 편이야. "

이렇게 옛날을 회상한다.

"나도 언니...좁은 평수에 살때는 정리가 안됐었는데, 지금은 장난감방 따로 있고 하니깐 편해..정리 안해도 티 안나고.."

"몇평인데?"

"38평이야 언니. 그냥 청소기만 휙 돌려"

달그락 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심장 한가운데서 크게 크게 메아리쳐 울린다.

너저분하게 걸려있는 옷들이 눈에 거슬리고, 작은 방에 펼쳐놓은 빨래 건조대가 맘에 걸리고, 청소하지 않은 화장실이며, 가지런하지 않은 찬장 안의 그릇들이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등뒤에 꽂히는 시선들이 몸둘바를 모르게 한다.

안 쓴다고 세워둔 침대 매트리스하며, 따스하라고 깔아놓은 면패드 이불하며, 녀석들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외투들, 좁은 현관, 어느것하나 맘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다.

나 왜 이러지? 내가 변했나? 난 이런 느낌 안 생길것 같았는데, 나도 별 수 없구나.

약속 있다고 오지 말라고 할걸 괜히 오케이했나? 별별 생각들로 머리속이 복잡하다.

밖에 나가 돼지갈비를 먹었다.

우리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 보니 배가 부르다.

밖은 이미 깜깜해졌다. 영숙이네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한다.  그저 다 잊어주길...하면서.

다 가버렸는데도 맘은 왠지 발걸음을 더 무겁게만 한다.  집에 들어오니 저녁 7시 40분.

유난히 좁아보이는 집, 그 한켠에 서서 남편을 위해  저녁밥을 짓는다.

두 녀석은 피곤한 하루를 접고 꿈 속으로 빠져든다.

덕분에 내게는 잠깐의 여유가 생긴다. 간만에 컴퓨터를 켠다.

새 메일이 몇십통 쌓여있다. 보지도 않고 전체선택을 눌러 삭제를 하려는 찰나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남편이 보낸 메일이다.

" 오랜만이야

내가 몇번이나 편지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제야 답장을 하네.

매일매일 힘들고 괴로울거라고 생각이 들지만 말한마디 따뜻하게

못하는 나네....

힘들게 직장생활하며 아이들  돌보느라 더욱더 고단할텐데

너무 힘들면 그냥 그만 두고 집에서 살림했으면 좋으련만

언제든 상관없어 난 괜찮으니까

기분 좋은아침이 되길

다음에 또 편지할께 사랑해"

내 마음속에 1000평짜리 커다란 집이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