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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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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BY 하나 2004-09-02

기나긴 여름이 끝나간다.

8월 마지막 날짜에 X표시를 하면서 분당에서의 5년을 마감한다.

여고동창 선이는 사회에 나와서 가까와진 친구다.

학교 때는 정작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따로 있어 주로 그네들과 무리지어 다니느라 선이와는 어울릴 기회조차 없었다. 

빡빡한 직장 일에 치이고, 내 맘 같지 않은 각양각색의 낯선 사람들에게 지쳐있을 무렵 힘없이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낯익은 얼굴. 그때는 왜 그리도 그 얼굴이  반갑던지...그 친구가 바로 선이였다.

몇년을 뛰어넘어 사람들이 보건말건 길 위에서 다 큰 처녀 둘이서 팔짝팔짝 뛰었다...

어제 만난것처럼 일상을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한두번 전화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마음을 가까이 두게 되었다.

오히려 어릴 때 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친구들에게는 말 못했던 내 맘속의 갖가지 응어리들도 이상하게 그 친구한테는 술술 풀어낼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낯선 이에게 내 맘을 얘기하는 것 처럼 어색했지만, 말 없이 끝까지 변함없는 표정으로 내 얘기에 귀기울여주는 그 친구의 모습에 한없는 위안을 받았었다. 그렇게 맘 속의 응어리들을 풀어버리고 나면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친구는 나로 인해 무거워진 마음으로 까페를 나서곤 했었다. 하지만, 한번도 내게 버겁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간간이 상대를 정해놓지 않고 뇌까리는 선이의 가벼운 욕지거리는 오히려 꽉 막힌 내 맘에 숨통을 트여주곤 했으니까...

욕이란 것이 가끔씩 뇌까려보니 참 묘한 구석이 있었다.

욕이란 나쁜 사람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어릴 때의 내 편견이 과감히 무너지면서

그로 인해 마음에 오히려 여유가 생기는 것이었다.

한번도 부모 말을 거스를 줄 모르고 살아온 나는 NO라고 할 줄을 몰랐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건 때때로 불만으로 내 맘에 앙금이 되기도 했다는걸 그때는 몰랐었다.

그 앙금을 깰 수 없어서 나중에 힘겨워지곤 할 때 선이는 내게 그 방법을 일러준 셈이었다.

그렇게 별 뜻 없이 사소한 욕지거리를 내 뱉음으로써 그때 내 맘이 얼마나 가벼워졌던가.

나도 이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한편 얼마나 시원했던가.

대놓고 반항은 못하면서도 그렇게 한번 내 뱉으면서 얼마나 숨통이 확 트였던가.

지금도 선이랑 통화할 때는 가끔 가벼운 욕지거리가 오간다.

이를 테면...

"이년이..." 라든가 "이 눔의 지지배가..." 라든가...'미친 것" 이라든가..."이그, 병신.."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상대를  얕보아서라든가  정말로 나쁜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건 아니다.

몇년을 지내오면서 우리는 전화통화할 때 이런 말을 일종의 추임새처럼 쓴다.

그러면 그 순간엔 고민도 고통도 저 멀리 사라져버려서 좋다.

고민을 심각하게 말하면 선이가 혹은 내가 "이년이!!"라고 한마디 하면 그건 곧

 "별 쓸데없는 걸 갖고 고민하고 있어"와 같은 말이 되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내 웃음이란 놈이 배실배실 입가로 터져나온다.

암튼 선이는 그렇게 나를 막 대하는 듯 하면서도 언제나 내게 최선을 다하는 친구였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친구다.

선이는 분당 빌라에서 전세를 살았었다.

집주인들이 돈에 눈이 어두워 온전한 집을 반으로 갈라 벽을 만들고 세를 주는 일이 많았던 지역이라, 선이도 비싼 돈으로 다른데보다 훨씬 적은 평수에서 오밀조밀 살아야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우면서 보석같은 그들의 재롱에 푹 빠져 지내다가도

이따금 좋은 집을 갖고 싶다고 투덜대기도 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현재의 상황에 결코 실망하지 않는 용감한 그녀였다.

그런 선이가 드뎌 용인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물론 대출을 받아서 분양 받은 집이긴 하지만, 엄연히 내 집을 사서 이사를 간 것이다.

9월은 그렇게 뜻깊게 시작이 되었다.

그 얘기를 들은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더 손꼽아 기다려왔다, 이사날을.....

이사갈 날짜를 혼자서 꼽아보고, 무엇을 살까 궁리도 해보고...

내 이런 마음을 선이는 알까?

무슨 선물을 해줄까 전화로 물었더니 필요없단다.

와서 하룻밤 묵어가란다.

선이는 그런 친구다.

보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하는 친구다.

그 가족들 모두에게 9월은 행복이 시작되는 달이었으면 좋겠다.

선아, 늘 행복해라.

조만간 가족 대동하고 놀러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