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를 읽고나서…
이 책은 모두 두권이지만, 일반적인 구성과는 다르다. 보통의 장편소설이 상, 하로 구분되어지는 것과 달리 이 책은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두명의 작가가 각각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펼쳐나간 책이다. 두 권을 다 읽어야만 둘의 사랑 이야기가 완성되는 그런 독특한 구성의 책이다.
남자 주인공 쥰세이의 이야기는 일본의 작가 츠지 히토나리가 썼고, 여자 주인공 아오이의 이야기는 일본의 3대 여류작가 중 한명인 에쿠니 가오리가 썼다. 영화로도 개봉되어 많은 일본인들에게 회자되었던 이 소설은 두명의 주인공, 두명의 작가, 그리고 두명의 번역가가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독특한 구성에 호기심을 느끼며 첫 페이지를 펼쳤다.
이탈리아에서 일본인 학교에 다녔던 쥰세이와 아오이는 스무살 대학생 시절에 운명처럼 만나 연인사이로 발전한다. 쥰세이는 수줍음 탓에 정작 자신의 감정조차도 친구 다카시로 하여금 미리 아오이의 마음을 타진해본 후에야 고백을 하는 그런 여린 남자다. 지나치리만큼 조심스러운 태도는 자라온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쥰세이의 엄마는 자살을 하고,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급격히 사랑에 빠지면서 도무지 쥰세이를 돌보지 않고 타인처럼 지내왔던 것이다. 오직 할아버지만이 친구요, 살붙이로서 쥰세이에게 삶의 지표를 제시해주었다. 아버지와 하루종일 같이 있는 일요일이 싫다고 말하는 쥰세이는 그런 때는 자기 방에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 있을만큼 스스로를 가두고 지냈다. 그런 폐쇄성과 자신없음과 외로움이 편안하게 자신을 감싸주는 넓은 광장과 같은 여자 아오이를 만났을 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발해 버린 것이다. 모든 열정을 쏟아 아오이를 사랑하고 믿었기에 설령 그것이 질투일지언정 억압일지언정 쥰세이는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오이의 임신중절 사실을 알고는 격렬하게 화를 내며 사랑의 열정은 순식간에 냉기로 얼어버렸다. 결국 쥰세이는 너를 믿을 수 없다며 연인에게 떠날 것을 요구한다. 전후 사정도 묻지 않고 그는 화를 삭힐 줄 모르고 아오이를 내 몰았다. 그녀는 울지도 않고 자리를 물러난다, 깡 마른 몸집이지만 늘 강인했던 것처럼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아….곧 이별이 닥치는데도 한마디의 변명도 못하는 아오이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당신의 아버지가 와서 나를 며느리로 맞을 수 없다며 난리를 피웠다는걸 왜 얘기 못하는지…중절수술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얼른 쥰세이에게 말하고 사랑과 이해를 구하라고, 쥰세이를 잡으라고 소리쳤지만, 아오이는 내 외침에는 아랑곳없이 그냥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이탈리아의 메미가 들어왔지만, 사랑이란건 의식적으로 되는건 결코 아니지 않는가. 쥰세이는 미래로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꾸만 역행하고 있었다. 결국 자기는 아오이를 잊지 못함을 알고 메미에게 결별을 고한다.
아오이는 그렇게 4년간의 열정시대를 가까스로 추스르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죽을듯한 고통이 살면서 잊혀지는 듯 했지만, 그건 잠시 숨어 있을 뿐이었다.비가 자주 내리는 밀라노의 날씨탓이라고만 돌리기엔 지나칠 정도로 아오이는 늘 우울하고 그늘진 얼굴로 마음 속의 허전함을 채우지 못한 채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던 것이었다. 미국인 애인 마빈과 동거에 들어간 아오이는 마빈의 열정적인 사랑에도 결국 마음을 열지 못하여 그를 늘 불안에 떨게한다. 같이 미국으로 가자고 고백하는 그에게 아오이는 예고없었던 결별을 고한다. 그와의 생일파티를 앞두고 아오이는 갑자기 피렌체로 향한다.
스무살 어린 나이에 지나가는 말로
“내 서른살 생일에 피렌체의 두오모에 오르자” 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마음가는 대로 발길을 움직였다.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거라며 올랐던 400개의 계단..그 맨 꼭대기 쿠폴라…거기엔 쥰세이가 저녁 놀을 한 껏 받으면서 미리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의 힘에 이끌려 이 곳에 오른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사망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그의 사망 소식을 접했음에도 쥰세이는 갈 수 없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을까? 그래서 헤어져서도 서로 잊지 못해 가슴 아파하며 사는 연인들을 끌어당기는 걸까? 다투었던 연인들도 서로 당겨서 보듬게 하는 걸까? 맞아, 연인사이에는 분명 끈이 있는거야..나도 연애시절 남편과 다툼끝에 결별을 고했지만 결국 다시 만난 걸 보면 그 끈은 분명 있는거야. 그건 운명이란 이름으로 혹은 큐피드의 화살이란 이름으로 혹은 인연이란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겠지만 끈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아오이와 쥰세이에게도 그 끈은 남아 있었던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빠르게 넘겨갔다.
두 사람은 재회한 그 3일간의 짧은 여정 속에서 다시금 옛사랑을 확인하지만, 결코 서로를 잡지는 못한다. 현재의 삶이 있으므로 담담히 떠나보내는 쥰세이,….국제선 열차에오르는 아오이… 이 장면에서 나의 안타까움은 몇배로 뛰어 올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또 과거의 열정적인 사랑을 억지로 냉각시킨채 현재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쥰세이는 예전의 그 쥰세이가 아니다.
이제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음을 뉘우치며 그는 급하게 국제특급열차표를 끊는다.
아오이보다 15분 먼저 밀라노에 도착할 수 있다.
쥰세이는 과거의 열정을 현재로 다시 끌어내고자 뛰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하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쥰세이!!! 가서 잡아..아오이를 잡아.
냉정과 열정사이…사랑이 한창일 때는 모든게 열정으로 달아오르지만, 그건 이별과 동시에 급격하게 냉각되어 냉정이라는 마음으로 식은채 덩그마니 남아버린다. 하지만, 냉정과 열정사이에는 결국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끈이 있어서 언제든 냉정에서 열정으로 끌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 사이엔 결국 틈이 없는 것이다. 틈이 있다면 오직 마음뿐…그 마음을 열정으로 바꾸는 건 어디까지나 내 몫이리라. 냉정으로 가려는 마음을 자꾸만 다독여서 열정시대를 살수 있도록 하는 책임은 내 몫이다. 열심히 사랑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