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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이름으로


BY 蓮堂 2007-10-28

 



어느 대학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대학생 20%가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쓸 줄 모른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이름은 83%, 아버지 이름은 77%가 쓸 줄 모른다고 개탄해 하는 기사를 보고 적이 놀랐다. 최고학부를 다닌다는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가족의 이름을 한자로 옮길 줄 모른다는 기사가 납득이 가지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맘으로 아들 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당연히 쓸 줄 알거라는 결론부터 지어놓고 확인 차 물어 보았더니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아버지 이름은 쓰겠는데 엄마이름은 어려워서 정확하게는 쓸 줄 모른다고 했다. 83% 속에 내 아들 녀석까지 포함되어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엄마 이름이라서 소홀히 생각해 쓸 줄 모른다고는 여기지 않았지만 아비 이름은 훈과 뜻까지도 꿰고 있는 사실과 비추어 볼 때 은근히 서운한 맘이 들었다.

딸 이름을 돌림자 넣어서 짓는 사람이 그리 흔치 않았던 시대지만 아들 둘 낳은 뒤에 태어난 귀한 맏딸인지라 집안 돌림자 ‘편할 영(寧)’자를 넣어서 지은 특별한 내 이름에 대해서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쓰기도 쉽지 않고 써 놓아도 여간해서 모양새가 나지 않는 어렵다면 어려운 글자다.

제일 흔한 내 이름이지만 ‘편할 영’자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영화 영(榮)’자나 ‘꽃부리 영(英)’자를 쓴 사람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내 이름이 어찌 보면 희귀종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엄마 이름에 대해선 애써 물어보지도 않았고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초등학교 들어가서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하고나서야 엄마에게도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엄마는 그동안 이름은 물론 신(申)이라는 성(姓)까지도 박탈당하고 그저 ‘이(李) 엄마’라는 잠정적인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몸담았던 직장에서 호적 업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요즘과는 달리 시골이지만 하루에도 출생신고가 많았다. 그렇지만 격식에 맞게 써 온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서 내가 대필 해 주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가장 곤혹스러웠던 게 종종 이름을 지어 줘야 하는 일이었다. 남자아이는 집안 돌림자를 넣어서 획과 음양오행에 맞춰 머리 싸매고 지어오는 데 반해서 여자 이름은 아예 짓지도 않고 생년월일만 써 가지고와서 나보고 아무거나 지어 달라고 떼를 썼다. 돌림자는커녕 좋은 이름인지 나쁜 이름인지 조차도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음이다. 이름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니고 출생신고를 하기위한 이름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기억으로도 남자아이 이름은 지어 준적이 없다.

여자의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나 같은 돌팔이 작명가에게 맡겼을지도 모르지만 이름이 팔자를 좌우 한다는 작명가들의 말을 장삿속이라고 여기며 무시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남의 이름을 지어 줄땐 거의가 한자로 기재해야 하기 때문에 딴에는 음과 뜻이 잘 조화가 되고 부르기도 좋은 이름을 골라서 지어야 했다. 많이 불려지는 이름이 좋다는 소리를 그나마도 귀동냥한 덕분에 유명한 사람의 이름도 빌려왔고 책에서 본 이름을 써 먹기도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이름이 ‘영신’이었다. 심 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자 주인공 이름인데 내가 아직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질녀가 결혼하기 전에 이름이 안 좋다고 해서 개명을 했다는 소리에 미안하고 민망해서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죄 지은 기분이었다. 그 아이 이름을 왜 내가 지어야 했는지 지금도 의문이지만 아마도 내가 그 업무를 보고 있을 때였으니까 모든 것을 나에게 일임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마도 딸아이였기 때문에 돌팔이인 나에게 맡긴 것 같았고 조카 이름은 아버님이 사주에 맞춰서 몇 며칠을 머리 싸매고 지으신 덕분에 박사라는 학위도 받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습게도 내 딸아이 이름은 시아버님이 지으셨지만 아들 녀석 이름은 집안 돌림자를 넣어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지은 비싼 이름이다. 딸 아들 구별 안하노라고 호언하시던 시아버님도 어쩔 수 없이 남아선호사상에 앞장 선 편 가르기를 하신 모순을 범하셨다. 이 사실을 두 아이 모두 모른다.

어릴 때는 그래도 이름이 불려지지만 혼인을 하면 친정동네 이름을 딴 ‘~~댁’이라는 택호가 곧 이름이었던 시절도 이젠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

요즘은 문패나 청첩장에 부부이름이 나란히 올려질 뿐만 아니라 부모 성을 같이 붙여서 지어진 생소한 이름도 심심찮게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직장에서도 ‘~양’이라고 불려지던 예전의 호칭이 깍듯이 이름을 불러주는 사회분위기로 변화된 바탕엔 그리 달갑지 않은 뉘앙스를 풍기는 이유 말고도 한층 업그레이드 된 여성들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더 짙게 깔려있는 것 같다. 여자의 입지나 위치가 이제는 남자와 동등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지만 행여 과유불급으로 가장자리 넘칠까 우려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 가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는 외국과는 달리 결혼을 하더라도 성과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하니 대단한 대한민국의 법이지만 해석이 안 되는 아이러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훑어보면 여자들이 문헌에 오를 만큼 출세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가 변변한 이름 두자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짐작을 해 봤다. 작자미상으로 전해 내려오는 옛시조 중에는 아마도 이름 없는 여류시인들이 남긴 작품도 꽤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호적부에는 막연하게도 이씨. 박씨, 김씨로 올려졌거나 아명을 그대로 올려서 부르기엔 무리가 있는 이름들이 많았던 기억은 예쁜 한글이름이 유행하는 요즘의 아이들과 너무나 대비가 되어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 나야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물론 한국동란 이전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지만 내가 겪은 바로는 무지한 사고의 꼬리는 70년대 말까지도 이어진 걸로 알고 있다.

이름을 써먹고 불려질 여가가 없었던 암울한 시대에 태어난 죄로 그럴 듯한 이름 하나 없이 살다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시대의 한 페이지에 불과한 것 같지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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