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여전에 들였던 봉숭아물이 하현달 같이 손톱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 달려 있다. 언제부터인가 난 맨질맨질한 매니큐어보다도 손톱 깊숙한 곳에서 배어 나오는 듯한 봉숭아물이 좋아 손톱이 밋밋하게 빌 여가 없이 밤새도록 들이곤 했다.
밤잠을 설쳐가며 들인 만큼 손톱 가득 들어찬 봉숭아물은 핏빛보다도 더 강열한 검붉은 빛이지만 섬뜩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그 위에다가 맑은 매니큐어를 덧칠 해 놓으면 윤기가 나면서 더욱 선명한 빛깔을 띠게 되지만 가급적이면 그대로 두는 것이 손톱건강에 이롭다고 해서 한 동안은 그대로 둬 보기도 했다.
지난여름 청마 문학관으로 문학기행을 갔을 때 청마의 생가 뜰에 흐드러지게 핀 봉숭아꽃잎을 관리인의 눈을 피해 한 움큼 땄다. 꽃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그럴싸한 말씀을 등에 업고 도둑질 한 봉숭아꽃잎을 백반에 짓이겨 냉동고에 보관해 놓았다. 서너 번은 들일 수 있는 분량이었다. 철이 지난 봉숭아물을 손톱에 들이고 다니면 보는 이 마다 기연가미연가하며 자세히 들여다본다. 시중엔 중국에서 수입한 봉숭아분말을 팔고 있지만 꽃잎을 짓이겨서 물들인 것 하고는 색깔 자체가 틀리다. 뿐만 아니라 얼마가지 않아서 색이 바래지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봉숭아물이라고 이름 붙이기는 애매하다.
성의가 대단 하다는 찬사 끝에 첫사랑을 기다리느냐고 은근한 우스개를 던지면 핏줄을 타고 돌던 뜨거운 피가 정수리를 타고 발끝까지 빠져나가는 듯한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딱히 억울할 일도 서러울 일도 없을 것 같은 기억들도 첫사랑이란 단어에 휘둘리면 비틀어 쥐어짜는 시늉을 해서라도 아름다운 기억들로 승화시키고 싶어 한다. 어쩌면 첫사랑이어서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 봉숭아물이 첫눈 올 때까지 닳지 않고 남아 있으면 첫사랑을 만난다고 해서 일부러 여름 끝자락에 들이기도 했고 어느 땐 가을 중간에도 들여 보았지만 첫사랑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추지 못해서 번번이 비켜간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꿰고 있지만 은근한 기대에 슬며시 기댔던 바람은 나이가 들수록 한쪽이 무너지는 비대칭에 대한 반발일수도 있겠다.
첫사랑......
이 ‘첫’이란 단어는 ‘처음’이란 뜻이지만 웬 지 풋풋하고 싱그러운, 그런가 하면 초봄에 흙을 밀고 올라오는 새싹의 그 여린 눈빛이 연상된다. 세상 밖으로 처음 얼굴 내밀고 나오면 생소함에 몸이 떨리고 또 다른 세계의 동경에 대한 신비감으로 몸살을 앓지만 두렵고 설레는 이면엔 호기심과 기대가 키워 놓은 장밋빛이 사고의 키를 높여 놓는다.
첫사랑은 털끝까지도 떨리게 하는 묘한 힘이 있는가 하면 늘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다가 빈틈이라도 생기면 비집고 올라오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 질긴 생명력 덕분에 평생 가슴에 묻혀 있어도 바래지지 않고 떠 올릴 때마다 또 다른 색깔로 되살아난다.
나의 첫사랑의 시점을 떠 올리다 보면 황 순원님의 ‘소나기’속의 소녀가 생각난다.
소나기를 맞고 소년의 등에 업혔을 때 입었던 흙물 묻은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는 애절한 얘기는 사춘기를 벗어나면서 관례처럼 치러야 할 의식의 한 부분 같아 맘이 짠해 온다.
나를 업고 개울물을 건넜음직한 유년의 기억은 없지만 사십 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잡힐 듯한 희미한 기억이 어렴풋이 한군데 머문 곳은 초등학교 3학년 교실이었다. 내 짝꿍이었던 남자애를 기억해 내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그 애가 내 첫사랑이었다고 잘라 말하기에는 이성에 대해서 문외한이었던 코흘리개에겐 무리수가 따랐다. 그러나 나하고 다투고 난 뒤 서울로 도망치듯 전학 가버린 뒤에 비어있는 자리가 보기 싫어 일부러 결석을 해야 할 만큼 내가 받은 충격은 컸던 것 같다. 싸운 게 미안해서였는지 아니면 이성에 대해 차츰 눈이 뜨여질 무렵에 닥친 이별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는 몰라도 아직도 그 애를 생각하면 가슴 한 쪽에선 실금 같은 균열이 생긴다. 내가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는 만큼 나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미치자 한편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첫 사랑은 짝 사랑이라고 했든가.
세월이 훌쩍 나를 키워 놓았을 때 스스로도 주체치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만 넓혀 놓고 미처 여미지 못해 전전긍긍해야 했지만 어느샌 가 열어놓은 옷섶 안으로 슬며시 배어든 또 다른 나를 보아야 했다. 너는 내가 아니라고 강하게 밀어 내면서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모순을 범한 뒤에는 더 이상 거부 할 자신이 없어졌다. 받아들이고 어우리고 끝내는 등을 보이고 말았지만 종교를 가지다 보니 ‘인연’에 대한 확신이 나의 버팀목이 되었다. 고리가 맞물리지 않으면 이어질 수 없는 것이 또한 세상 이치라고 했다. 운명과 인연도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냐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지만 순리와 역리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괴리의 간격을 줄일 수 있을 만큼 난 영악하지도 똑똑하지도 못했다. 물기 없이 껑충하게 웃자란 여린 감성으로 상대하기엔 모두가 버겁고 두렵기만 했다. 첫 사랑의 매력은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립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의 첫 사랑은 두 종류다.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자연적인 것과 미필적 고의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
첫사랑을 화두로 삼으면 으레 나하고 다투던 그 아이의 살짝 찌푸린 양미간이 선연히 떠오르는 것을 보면 내가 만든 것 보다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이 더 진하게 가슴에 닿는 모양이다.
봉숭아물을 들이는 날은 남편비위를 맞춰 놓아야 했다. 일회용 비닐장갑 손가락 끝을 잘라서 손가락에 끼우고 유리 테이프를 붙이면 간단한데 왼쪽은 혼자서 할 수 있지만 오른쪽은 도저히 혼자 힘으론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첫사랑을 떠 올리며 비몽사몽 허방을 디디고 있을 때 남편은 핀셋으로 부지런히 봉숭아 즙을 내 손톱위로 옮겨 놓고 있었다. 지금 당신 마누라 머리 속은 온통 지나간 남자 생각으로 추억을 되새김질 하고 있는데 당신은 숙맥같이 봉숭아 즙 흘릴까봐 이마위에 힘줄 세우며 부지런을 떨고 있냐고요.
미안하고 민망한 맘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봉숭아물을 들이는 날 밤은 또 다른 내가 똬리를 튼 무거운 가슴을 부둥켜안고 이래저래 잠 못 드는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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