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파를 차단하는 것은 물론 공기정화작용까지 한다는 입소문이 유행병처럼 번진 산세베리아를 티브이 옆에 두었다가 신빙성이 없다는 임자 없이 떠도는 말에 슬그머니 베란다로 밀어내었다.
가끔 물이랍시고 한 모금 끼얹어 줄 때만 스쳐보는 게 고작이었던 어느 날 키 큰 산세베리아 틈새로 힘겹게 흙을 밀고 올라오는 잡초로 보이는 여린 싹이 눈에 띄었다.
미처 목을 다 내밀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후벼낸 이유는 한 모금의 물기와 영양가라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순전한 욕심의 발로였다.
목이 잘린 채로 손톱 끝에 끌려 나온 싹은 솜털도 벗지 않은 태아 같았다.
그러나 뿌리가 남아 있었음인지 그 자리에선 끊임없이 싹은 돋아났고 그리곤 목이 잘리기를 거듭했다.
그런데 한동안 잊고 있는 사이에 나에게 숱하게 핍박받던 잡초가 어느 샌가 산세베리아 만큼이나 훌쩍 큰 키로 자라서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잘한 잎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좁쌀같이 작고 앙증맞은 노란 꽃봉오리는 터지기 직전의 포화상태였다.
건드리면 팝콘같이 사방으로 튀어서 달아날 것 같이 아슬아슬했다.
내 거친 손아귀를 피해서 저토록 꽃을 피우려고 안간힘을 썼을 이름모를 잡초가 대견하고 안쓰럽기까지 해서 나도 모르게 미안함이 실린 손짓으로 어루만졌다. 남의 집에 뿌리내린 것이 미안했던지 가솔 하나 안 거느리고 자기 한 몸만 껑충하게 키운 채로 꽃을 품고 있었다.
문득, 이십 여 년 전 구미(龜尾)로 전근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서 주인집 이층 옆 자투리 부지에 아무렇게나 지어진 날림 집에 세 들어 살 때가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주택보급률이 낮아서 집이라고 생긴 것은 부르는 게 값이었고 게다가 아이 둘 딸린 사람에겐 쉽게 방을 주려하지 않아서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다가 얻어진 집이어서 앞뒤 안 재고 짐을 풀었다.
누우면 벌어진 유리창틈 사이로 하늘도 보였고 한 겨울에는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밤새 웅크리고 자야 할 만큼 열악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만큼 주머니가 불룩하질 못했다.
그때 당시 딸아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주인집에도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평소에는 잘 어울려 놀다가도 곧잘 다투기도 했는데 어느 날 딸아이의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소리에 달려가 보니 딸아이의 얼굴엔 길게 손톱자국이 나서 피가 맺혀 있었다.
주인집 아이가 얼굴을 손톱으로 할 퀸 것이었다.
유난히도 피부가 희고 깨끗했던 딸아이의 얼굴은 할 퀸 자리가 움푹 패어서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약자인 엄마의 입지를 아는지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그 큰 눈에 눈물만 가득 담고 있었다.
울음을 참느라고 작은 어깨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 순간 왈칵 눈물이 솟았다.
결혼 한지 십년 만에 본 귀한 자식이라고 늘 아들을 끼고 살던 주인아낙은 미안하다는 소리 대신에 놀다보면 그럴 수 있다는 말로 집주인 특유의 근성을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내 입장으로 서는 한마디 싫은 내색을 할 수가 없어서 울먹이는 애꿎은 딸아이만 닦달해야 했다.
싫은 내색 해 봤댔자 불리한 것은 나다. 주인의 성격상 당장 다음달에 낼 세금에 괘씸죄가 추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하면 방 빼라고도 으름장 놓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입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방 빼’ 라는 말일게다.
내돈주고 떳떳하게 살면서도 늘 가진 자 앞에서는 당당해 질수 없는 비겁함으로 일정한 기준 없이 주인입맛에 따라 매겨지는 세금에 대해서 함구해야 했고 장독대에 내 놓은 고추장이나 간장을 퍼가도 모른 척 해야 편했다.
약자와 강자의 편 가르기의 기준이 되는 돈의 위력엔 자존심이나 체면도 휴지조각에 불과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오죽하면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딸아이조차도 현실을 직시하고 울음을 삼키지 않았던가.
지금도 보일 듯 말 듯 한 그때의 손톱자국만 보면 가슴이 짠해온다.
그동안 내 발자국 소리에 몸을 움츠리고 간을 졸여야 했던 잡초는 마치 주인집 아들에게 얼굴상처를 입은 뒤 그 아들만 얼씬거리면 두 팔로 얼굴을 감싸며 방어자세를 취하던 딸아이의 긴장된 표정을 닮아 있었던 것 같다.
얼마나 겁이 나고 떨렸을까.
새삼스럽게 목줄을 타고 올라오는 울컥거림에 콧등이 시큰거렸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설음이 어떠한지 말 못하는 식물이라고 모를 리 없다.
어디서 어떻게 날라 와서 산세베리아 옆에서 둥지를 털려고 했는지 몰라도 이젠 가솔을 거느리고 살림도 불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고슬고슬한 부엽토에다가 흙을 섞고 제법 너른 화분으로 이사를 시켰다.
굳이 잡초라고 이름을 붙여서 천시할 이유가 없다. 귀한 것만이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흔하게 늘려 있는 것이라도 존재의 이유는 똑같다.
생명 그것이다.
그 좁쌀 같은 꽃봉오리를 피워내기까지는 숭고한 인내력과 살고자 하는 질긴 생명력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했다.
내손에서 여린 목이 잘려 나갔을 때 삶을 포기 했다면 나를 감동 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리를 옮기면 몸살정도라도 할줄 알았던 그 잡초는 잔병치레 하나 없이 드디어 기하급수적으로 식솔을 늘려갔고 너른 화분이 비좁도록 꽃을 피워댔다.
이름이라도 붙여 주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꽃잎 다섯 개가 다 벌어졌지만 직경은 콩 반쪽보다도 더 작았다.
너무 작아서 손끝에 걸리지도 않았지만 화분 안에서 오밀조밀 어깨를 맞대고 다퉈 커온 덕분에 난 부자라도 된 듯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거미줄 같이 엉켜있던 뿌리들이 하나둘 생명의 끈을 놓기 시작했다.
잡초의 수명은 일년이 고작이었던가보다.
겨우 그 일년을 살다 가려고 숨죽이고 내 눈 피해서 삶의 촉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하루를 살려고 일년 동안의 약충 시기를 거쳐야 하는 하루살이에 비하면 그래도 장수를 한 셈이다.
일년 반 동안 셋방 살면서 설음과 애환이 깃들었지만 내 집 인양 잠시 뿌리 내리며 살았던 그 자투리 집을 떠나올 때 주인집 담장위에 얹힌 볼품없는 용설란 옆에 기생하던 이름모를 잡초가 생각났다.
셋방 사는 신세는 나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잠시 걸음이 멈추어졌던 기억은 한 가닥씩 떼어내는 뿌리와 같이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가슴시린 과거사다.
내가 셋방살이 청산하고 떠나올 때의 그 날아갈 듯 홀가분했던 기분을 생을 마감하고 사라지는 이 잡초는 알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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