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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해마다 이맘때면


BY 蓮堂 2007-02-13

 

          매년 이맘때면....



설 명절을 앞둔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수없이 달력을 보고 또 보며 머릿속은 일주일을 앞질러 가고 있었다. 제사장보기부터 시작해서 제사준비과정도 몇 번이나 점검을 해야 했고 명절 당일에 생길 수 있는 실수에 대비해서 꼼꼼하게 메모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했다. 시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는 한번의 꾸중으로 끝날 수 있지만 이제는 주모(主母)의 자리에 있는 만큼 그에 따르는 책임은 모두 내 몫이기 때문이다.

매년 모시는 제사와 명절인데도 불구하고 한두 가지의 실수는 끊임없이 따라 다녔다. 어느 때는 조기를 준비 해놓고도 눈썰미 부족으로 상에 올리지 않아서 눈물이 빠지도록 꾸중을 들었고 또 어느 해는 곶감이 빠졌지만 다행이 어른들께 발각(?)이 되지 않아서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건망증이라기보다는 으레 준비 했겠지 하는 스스로의 믿음이 빚어낸 부작용 탓이다.

시어머님이 살아 계시던 때는 일주일 전부터 전화통에 붙들려 있어야 했다. 연세 드신 노파심이 빚어낸 주문과 당부는 미리부터 나를 질리게 했지만 내색은 할 수 없이 ‘예, 예’로 일관되게 대답해야 했다. 그 다음날 또 그다음날도 똑같은 주문을 들어야 했지만 마치 처음 듣는 자세로 임해야 하는 며느리의 고충을 아실 리가 없다. 이북이 고향이신 관계로 목청이 남보다도 더 높아서 자칫 꾸지람으로 들릴 수 도 있는 어머님의 음성 때문에 항상 가슴은 조마조마하게 긴장을 해야 했다.

꾸지람인지 예삿말인지 돌아가실 때까지도 아둔한 내 감각으로 가늠이 되지 못했지만 마음을 읽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다.

객지에 흩어져 있는 자식들 만나 볼 흥분으로 들뜬 시어머님의 명절은 하루가 아닌 명절 앞뒤의 일주일이다. 앞의 사나흘이 맏며느리인 나에게는 제사준비에 따른 상의 내지는 지시 차원이지만 정작 둘째 며느리에게는 언제 올 거냐, 차 조심해라, 선물 사지 마라, 등 내리 사랑의 티를 아낌없이 보여 주셨다. 열어놓은 대문께로 수없이 눈길을 주시며 더디게 가는 시간을 밀어내고 계셨다. 문턱이 반 이상 닳은 뒤에야 들어선 작은 아들 내외는 손님이었지만 부수수한 몰골로 주방을 헤어나지 못하는 맏며느리의 입지는 당연히 부엌데기다. 그러나 난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맏며느리였고 불평불만의 싹도 틔우지 말아야 하는 주인이었다. 오느라고 힘들었다고 애써 치하하는 말도 잊지 말아야 했다. 만약 시동생 내외가 싹수없이 굴었다면 내 불만의 싹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 올라 갔을 것이지만 내 고충 내 입지를 너무나 깊이 헤아려 주는 살뜰함에 난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치사랑은 없는 모양이다.

다들 흩어져 간 명절 뒤끝의 여운은 더 길었다. 길을 나선 작은 아들에게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궁금해 하셨고 흘려놓고 간 물건이라도 있으면 타박을 곁들이는 염려로 내내 전화기 잡고 늘어져 계실 동안 난 명절 뒤치다꺼리로 부엌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 치룬 듯한 집안 구석구석은 내 손이 닿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은 채로 널브러져 있을 수밖에 없다. 준비하는 것도 어렵지만 뒷마무리는 마지막 진을 빼 놓기에 충분했다. 사람의 먹는 입이 참 무섭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게 아니고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것 같은 결사적인 느낌은 명절 뒤엔 늘 찌꺼기 같이 남아있다. 맏며느리인 난 손님들 다 보내고 연휴가 끝나는 날 밤이 이슥해야 어른들에게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리곤 며칠을 아프지도 않은 병을 앓아야 했다. 보수적인 남편이 이 날 만큼은 어깨를 주물러주는 시늉을 한 덕택에 다행히 후유증은 오래가질 않는 걸 보니 나도 귀가 참 얇은 것 같다. 명절증후군이라는 신종 병명이 진작부터 생겼더라면 치유하는 약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먹을거리가 귀했던 시절에 명절만 손꼽아 기다리는 나와는 반대로 엄마는 명절이 범보다도 더 무섭다고 고개를 흔드셨던 그 이유를 내가 시집을 온 이후에야 알았다. 공포의 대명사는 범이 아니라 명절이었음을 너무 늦게 알았을까.

사람 죽는 줄 모르고 팥죽 들어오는 것만 안다고 하던 옛말이 새삼스럽다.

숨 막히게 답답했던 세월들을 뒤로 하고 어른들이 비켜준 자리에 이제 내가 서 있다. 피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자리인 만큼 주어진 일감도 곱절로 늘어났지만 피붙이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며칠 전부터 달력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아직은 시어머님처럼 긴 명절을 보낼 시점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우회적으로는 닮아가고 있는 나에게 나도 놀라고 있다.

동서에게 언제 올 거냐고 딱 한번 물었고 딸아이에게도 선물 사지 말라고 못을 박아두었다. 명절 앞두고 너무 무관심한 것도 어른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시어머님 흉내를 내고 보니 그 어른이 왜 그렇게 며칠을 들떠 계시는지 차츰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흉보면서 닮는다고 했던 모양이다.

내가 나이를 더 먹고 며느리를 보게 된다면 영락없는 시어머니 티를 낼 것 같아서 내 스스로도 불안하고 겁이 난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공수표는 일지감치 부도내는 게 차라리 솔직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고유명절은 크게는 조상을 받들고 기리는데 참뜻이 있지만 각박하고 빡빡하게 돌아가는 요즘에 와서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가족들이 오붓하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핑계도 이 명절에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 교통대란을 겪으면서도 부모형제 품에 안기고자 먼 길을 돌고 돌아서 고향땅 밟는 그 가슴 벅찬 감동을 명절이 아니고서야 어디 맛볼 수 있을까.

평소에 느끼는 감동보다도 더 진하게 가슴을 후리는 명절날 만남은 우리 조상들이 선견지명으로 물려준 귀한 시간이고 소중한 자리다.

자꾸만 달력으로 쏠리는 눈길의 횟수가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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