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나를 찾는 사람도 내가 찾을 사람도 없었는가 하면 걸려온 전화 한통 없는 날이었다. 그동안 혹시라도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아서 세상 한 쪽 귀퉁이에 멀찍이 밀려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의심으로 온 몸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했다. 사흘간의 나들이 여운이 아직도 온 몸에 달라붙어 있는 탓에 화석같이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다가 독일군의 눈을 피해 빛 하나 들지 않는 외딴 다락방에 몸을 숨긴 채 2년 동안 은둔생활에 들어 간 열다섯 살 유태인소녀 안네가 갑자기 생각났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긴박했던 그 긴 시간동안에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은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은 ‘안네의 일기’를 잉태함으로서 세인들의 눈과 귀를 밝히고 열어 놓았다. 그러나 내가 이 시간에 잉태하고 있는 것은 세상 밖으로 밀려 난 것 같은 소외감과 마디 없는 밋밋함뿐이다. 은근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인들에 대한 억지에 가까운 서운함으로 울릴 듯한 전화기를 몇 번이나 쳐다보곤 했지만 올 것 같아서 걸지 않은 오기를 부려 보기도 했다. 딱히 올 곳도 없지만 말이다. 가끔씩 드나들던 외판상인들의 벨소리도, 하느님 말씀 전한다는 교인들의 조심스러운 노크도 오늘따라 잠잠했다. 신문대금 받으러 올 날짜도 훌쩍 지났건만 다음달에 두 달 치를 한꺼번에 받을 셈인지는 몰라도 발걸음 미룬 작달막한 수금원 아저씨도 전에 없이 기다려졌다. 하루 한번씩 메시지 전하는 경비 아저씨의 걸걸한 옥내 방송도 꺼져 있다. 누워서 곁눈질로 본 방바닥은 사흘간이나 비어있던 집답게 잔 먼지가 깔려 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결벽증에 가까운 내 살림솜씨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시간도 그대로 숨죽이고 멈추어 있는데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괜한 거슬림 같아 이래저래 핑계거리라도 만들고 싶은 시간이었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란 극히 어렵다. 식물인간처럼 누워서 아무런 생각이나 움직임 없이 시간만 밀어내다 보니 하루 종일 기억에 남는 ‘한 일’이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은 희미하고도 어정쩡한 날이었다.
어둠살은 사위로 내려앉았고 불을 켜 놓지 않은 방안으로 바깥의 가로등이 비집고 들어왔다. 불을 켜면 그래도 무언가를 해야 하는 의무감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 또한 내키지 않는 일이었고 몸 하나 가누기 싫은 이런 날엔 달라붙은 그림자마저도 버겁고 거추장스러워서 커튼을 내려놓았다. 어둠 속에다가 몸 담그면 그림자도 함부로 따라 들어오지 못하기에 더더욱 불 밝히는 게 싫어졌다. 게으름의 극치다.
칩거 아닌 칩거로 하루 종일 세수 하지 않은 얼굴이 무겁고 답답했다. 바깥나들이 하지 않는 날엔 고양이 세수마저도 귀찮아서 양치 세 번을 세수로 간주하고 끝내 버렸다. 문득 참선을 위해 시월 보름부터 석 달 동안 동안거에 들어간 스님들 생각이 났다. 하루 동안의 인위적인 은둔을 가지고 일종의 칩거라고 이름 붙인다면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불가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 세끼 찾아 먹기란 염치없고 면목이 서지 않지만 입맛도 그리 달지만은 않아서 두 끼로 겨우 풀칠하는 시늉을 하고 나니 덜 미안했다.
늦는다는 남편의 전화에 입이 귀에 걸렸다. 한 번 더 움직일 빌미마저도 남편이 때 맞춰 앗아갔다. 정말로 이대로 몸이 굳어 버리지나 않을까 겁이 날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몸을 움직여 보니 천장이 기형으로 빙글빙글 돌아다니고 늘어져 있던 다리는 연체동물 같이 흐느적거렸다. 몇 번 좌우로 흔들어 보고 초등학교 때 배운 국민체조로 몸을 풀었다. 이젠 굳을 대로 굳어있는 몸이 쉬이 나긋 거리진 않겠지만 몇 번의 몸짓으로도 사지가 풀리는 게 다행이었다. 얼마 전 굳은 몸 풀려고 시도했던 요가를 불발로 끝낸 것이 후회막급이다. 이 나이에 체조선수처럼 휠 때 휘어지고 접힐 때 접혀질 줄 알았던 착각은 한달을 버티지 못했다. 180도로 벌려지지 않는 두 다리에 무리한 힘을 가한 탓에 여러 날 절뚝거린 민망함은 두고두고 나를 절망케 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에게 관대해 지고 이해 폭도 넓어지는 여유로움을 본다. 어떻게 보면 관대함이라기보다는 나이를 먹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체념에 가까운 연치가 아닌데도 적재적소에서 나이를 들먹인다. 그러나 남들이 나이를 들먹이면 발끈하는 이중성이 비단 나에게만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녹피(鹿皮:사슴가죽)를 가로로 당기면 가로왈(曰)자고 세로로 당기면 날일(日)자가 된다는 이중인격자가 바로 내가 아닌가 싶다.
소파에 앉아서 리모컨을 쥐고 티브이(TV)화면을 여기저기 훑었지만 내 시선을 붙잡아둘 만한 프로가 없다. 몇 채널을 뒤져보니 온통 젊은 연예인들의 말장난과 사생활 까발리는 저속한 프로 일색이고 이런 종류의 프로는 내가 제일 혐오하고 기피하는 프로다. 이것도 어쩌면 나이 탓이고 세대차이인지는 몰라도 너무 얕고 치졸하게 편성된 방송 프로그램에 항상 반감을 가졌다. 그 금쪽같은 시간에 시청자들의 수준이나 취향은 아랑곳없이 상식의 수위를 벗어난 지나친 속살 깊은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대는 잡담에 식상한지 이미 오래다. 뉴스시간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남아 있다. 하루가 이틀 맞잡이로 늘어난 시간이 너무 아깝다. 비어있는 아이들 방을 기웃거려 보았다. 바쁠 땐 아무 생각 없이 들락거린 방이지만 이렇게 하루 종일 동선길이 백 미터도 안 되게 움직인 날은 괜스레 집 떠난 아이들 생각에 콧등이 시큰 거렸다.
시간에 쫓겨 허둥댈 때면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이 생각났다. 우리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조라고 했다. 동짓달 그 기나긴 밤 허리를 베어내어서 이불속에 감쳐 두었다가 임 오신 밤이면 구기구비 펴리라는, 시간을 모아서 유용하게 쓰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담긴 그 시조가 하필이면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 하는 날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오늘 같은 날이야 말로 반허리를 뭉텅 잘라서 갈무리 해 놓았다가 하짓날 짧은 밤이나 시간 쪼개는 바쁜 날 보태서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조물주의 피조물인 인간으로서는 언감생심 넘겨다 볼일이 아닌 모양이다. 생뚱맞고 부끄러운 발상이다.
바쁜 현대인들이 가장 만만하게 둘러대는 것이 ‘시간이 없다’라는 말이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고 마음이 없다고 하면 차라리 솔직하련만 모든 탓을 시간으로 돌려 버린다. 용서가 되고 이해는 될지 몰라도 그리 떳떳한 해명은 아닌 것 같다.
시간이 금 인줄 알지만 돌같이 여긴 낮 짧은 동짓달의 길기만 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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