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만 다녀오면 내 지갑은 항상 빈 죽정이 마냥 등과 배가 맞붙기 일쑤였다.
아버님이 맑은 정신으로 살아 계실 때는 엄마 몰래 서 너 번 접어서 손가락 굵기만 한 지폐 서 너 장을 손에 쥐어 드리며 입단속을 시켰고 또 아버님 몰래 엄마에게 드리며 두 눈을 꿈벅 거렸다. 돈 받은 걸 두 분이 아시면 서로 돈을 안 내어 놓으시려고 한다는 엄마의 우스개에 남편은 물론 아무도 모르게 내가 두 분에게 취한 방법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주위를 살피며 할머님에게 몰래 돈 건네주던 고모님의 수상한 행동은 세월이 훌쩍 뜀뛰기를 한 뒤에야 답을 얻을 수 있었고 어느새 나도 수상하던 고모님을 닮아 가고 있었다.
나를 통한 남편의 투명한 돈은 당당하게 생색을 내면서 보란 듯이 드린다. 그러니 엄마의 수입은 곱절이 되었지만 형식적인 손사레만 몇 번 휘젓다가 고쟁이 속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으시곤 했다. 곱절 수입에 대한 내색 없이 ‘아이고 이 사람아 나 돈 있는데......’ 라는 하나마나한 소리로 남편에게만 미안한 시늉을 하셨다.
나의 이런 앙큼한 이중 플레이를 꿈에도 모르는 남편에게 면목 없고 미안해서 가증스러운 억지소리를 할 때가 더러 있다.
“다른 여자들은 남편 몰래 친정에 퍼다 준다는데.”
그러면 박봉의 순진한 남편은 멋쩍은 웃음 지었지만 남편의 눈을 피한 뒷거래에는 늘 속이 상하고 맘이 불편했다.
친정에 돈 드린다고 트집 잡을 남편은 아니지만 구태여 드러내서 자존심 구기고 싶지 않았다. 부부지간에도 자존심은 필요하다는 내 생각이 지나칠 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부모님을 구차하게 만드는 빌미가 될까 싶은 우려의 마음이 더 앞섰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칫 넉넉지 못한 친정에 대한 ‘티’고 ‘흠’이며 ‘흉’이 될 수도 있는 민감한 부분이기에 더 숨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 한 푼 못 드리고 오는 날은 두고두고 맘이 편하질 않아 죄 없는 남편에게 말없는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영문도 모르는 남편은 나의 화살을 맞아야 했고 화살을 쏘아놓고 또다시 미안해서 나 자신을 나무라는 악순환은 기어이 은행구좌로 돈을 넣어드려야 끝이 났다. 혹시라도 섭섭해 하시진 않으실까, 수중에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 하시진 않으실까. 아무리 아들들이 드린다고 하지만 딸에게 기대하신 것도 있으실 텐데 출가외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얼굴에 철판 깔고 모르쇠로 일관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다.
지폐를 들고 반을 덜어내고 다시 보태는 갈등으로 몇 번 주춤거리다가 결국엔 다 드리고 나면 망설였던 그 순간이 너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자식에게 돈 줄때는 그런 망설임이 필요 없다는 것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부모님에게는 단돈 만원도 많은 것 같고 자식들에게는 몇 백배의 돈도 적은 것 같이 느껴지는 대물림은 영원히 해결 안 되는 채무채권관계일 수밖에 없다.
두 분에게 주머니를 털어드리고 나면 올망졸망한 조카 녀석들이 눈에 걸려서 남편 몰래 또 지갑을 열어 남아있는 잔돈마저도 다 털어 주고 빈 지갑이 되어야 비로소 할 일 했다는 만족감으로 마음이 가벼웠다. 어떨 때는 조카 녀석들마저도 곱절의 수입을 잡지만 미리 받은 돈 자수하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염치도 예의도 모두 잠식하는 돈의 위력이다.
시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남편은 한번도 직접 돈을 드린 적이 없이 항상 나를 거쳤다. 내가 알기로는. 나에 대한 신뢰도 있었지만 시부모님에게 내 체면을 세워주려는 속 깊은 배려가 고마워서 내 생활비를 더 얹어서 드린 적도 많았다. 마누라에게 눌려 사는 게 아니라는 무언의 암시는 덤으로 얻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챙긴 남편이지만 잔머리 굴려서 새 두 마리 잡을 만큼 계산적이지 못한 남편의 진심을 알기에 친정과 시집사이를 오가며 뒤탈 없이 줄타기한 내 재주도 과히 둔하진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알면서 묵인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고 있는지는 아직도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지만 얇은 월급봉투에서 자기도 모르게 퍼내는 일은 불가능 하다고 여기는 남편에게 긁어서 부스럼 내어 물어 볼 수도 없는 문제다.
언젠가 ‘아내가 남편 몰래 친정에 돈 주는걸 어떻게 생각 하냐?’고 남의 일인 양 돌려 물었더니 ‘그럴 수 있다.’라고 했다. 남편의 후한 말에 무겁던 마음의 짐이 다소 덜어졌지만 내 얘기가 아닌 남의 얘기니까 그렇게 너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고까운 생각이 한편 들기도 했다.
얼마 전 남편이 수술을 하기 전에 동서가 공식적으로 드러난 돈을 주며 입원비에 보태라고 했다. 그러나 퇴원 하기전날 시동생이 다시 수표 한 장을 건네며 무언의 암시를 던졌다. 예전에 시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도 그렇게 하는 걸 여러 번 보고 내가 못 마땅해 했다. 멀쩡한 동서 나쁜 사람 만들지 말라고 했지만 시동생은 멀다는 핑계로 부모님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불효를 그렇게라도 면하게 해 달라고 나에게 이해를 구했다. 동서가 안다고 해도 트집 잡을 만큼 속 좁은 사람이 아니지만 모르는 게 약이고 좋은 게 좋다는 구실로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나도 공범자 같아서 동서 보기가 너무 미안했다.
아내 몰래 또는 남편 몰래 피붙이에게 돈 쥐어 주는 그 마음 바닥에 깔린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 해 보았다.
남편 몰래 돈을 건네는 건 친정피붙이에 대한 애정이 바탕이 되어 있겠지만 궁색한 친정살림 남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자존심과 행여 부부싸움을 했을 경우 꼬투리 잡힐 무기로 둔갑 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편들은 언저리도 따라잡지 못하는 아내들의 영악함이다.
시집에 대한 가정형편은 이미 다 꿰고 있기 때문에 밀어 넣고 숨길 필요조차도 없는 남편의 자존심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경제’를 이유로 삼는다. 없는 형편에 시집에 퍼다 줄 돈이 어디 있냐는 게 아내들의 항변이다. - 물론 친정에 퍼다 줄 돈은 항상 꿍쳐둔다. 그래서 남편들은 아내 몰래 비상금을 피붙이에게 쥐어주게 된다.
경제권을 모두 아내들이 틀어쥐고 있는 현실에서 남편들은 항상 가난하고 써늘한 이방인이다. 뒷돈 챙기기는 아내들이 남편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남편들이 자기 목소리 높여서 피붙이 싸고도는 것은 부부싸움의 도화선이 되기 마련이다. 아내가 시집 흉보는 만큼 남편도 친정 흉을 본다면 같이 살 여자들 하나도 없을 거라고 하는 말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여권신장에 따른 부작용이라고 하면 지나칠지 몰라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양상을 보게 된다.
남편이 혹은 아내가 속에다가 빗장 지르고 뒷구멍으로 제 핏줄 챙기기에 급급한 것을 무턱대고 나무랄 수는 없다.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
예전부터 수입은 여러 주머니라도 지출은 한 주머니에서 나가야 살림이 된다고 했을 만큼 지출의 투명성을 강조했다. 아무리 수입이 많아도 지출이 불투명하게 여러 주머니에서 퍼내면 바닥이 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회구조가 자본주의로 급변한 현실에서는 한주머니만을 고집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가계 빚이 늘어 날 수밖에 없다고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나가는 주머니 숫자 줄이고 투명한 지출을 한다면 가계부도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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