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서른 세 살 된 친정조카가 공학박사학위를 땄다. 그 어려운 박사코스 밟은 지 7년만이다.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십팔 개월 만에 한글을 깨우치고 천자문을 익혔는가 하면 암기력과 수리력이 뛰어나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착각들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신동’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뛰어났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조기교육이 성한 요즘을 생각하면 신동도 시대에 따라서 등급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특별하긴 한 것 같았다.
주변으로부터 그때당시 인기프로였던 ‘묘기대행진’에 내 보내라는 권유를 숱하게 받기도 했고 봉암사 주지스님이 직접 공부를 시키고 싶어서 탐을 냈다가 아버님께 언잖은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아이를 도둑맞을까봐 막차기차 떠나기 전에 단도리 하는 것도 가족들이 할일이었다.
손바닥만한 지방에서 조카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유명세를 타서 조심스럽게 키운 조카지만 성장에 가속도를 내더니 너무 울 큰 탓인지 어느 시점 - 박사코스-에 가서는 주춤거려서 가족들의 애를 태웠다. 과학고와 과기대(과학기술대학)를 거쳐서 'KAIST'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학위 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일반대학과 차별화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카실력에 그만큼 주춤 거렸으니 애가 탈대로 탄 오라버니는 포기하고 취업하라는 마음에도 없는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서둘러 장가까지 간 가장으로서 직무를 유기 했으니 조카도 할말은 없었을테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한 우물만 판 집념이 빛을 본 것이다. 어릴 때의 그 무한한 능력을 생각하면 욕심에 못 미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조카가 택한 길로서는 최고의 영광이기도 했다. - 우리 가족들은 서울대 법대에 가서 판검사 되기를 소원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로 치는 자리니까.
열일 제쳐놓고 대전 학위식에 갔다. 조카 녀석의 그 늠름하고도 당당한 모습을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애정을 가지고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키운 연유로 남다른 욕심을 가진 조카여서 그런지 오라버니 내외에 지지 않을 만큼 내 속도 무던히도 탔었다. 온 가족이 기울인 정성과 노력의 결실을 맺는 날인만큼 한 달음에 모인 친정식구들의 결속력도 나에겐 힘이 되는 부분이다. 만사에 왜 이렇게 친정을 얽어 넣는지 몰라도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학사나 석사와는 달리 총장에게 학위증을 직접 받는 순간 눈앞이 흐려왔다. 넉 달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이 시간에 왜 그렇게 원망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천금같은 손자 학위를 그토록 염원하시더니.......
서울대학교 못 보낸 한(恨) - 조카 녀석이 왜 그런지 서울대학은 한사코 거부했다.- 을 박사학위로나마 위안받으시려고 했는데 천수를 다하신 그 운명을 어찌 하진 못했다. 맑은 정신으로 조금만 더 살아 계셨더라면 하는 한은 학위식 내내 가족들 마음 한켠을 아프게 했다. 3대 대기업에서의 콜(call)은 이미 받아놓은 상태고 선택은 조카 몫이라고 했다. 들 떠 있는 친정식구들의 기대치는 상한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명예는 받아 쥐었지만 돈하고는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눈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내 자식도 아닌 친정 조카의 학위에 내 어깨가 뻣뻣해졌다.
여자들은 자고로 친정이 미력하면 기가 꺾이고 주눅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호가호위(狐假虎威)다. 친정이 든든하고 힘이 있으면 내 입지도 넓어지고 한층 더 당당해진 기세로 시집에서의 자리도 견고해 진다.
조카의 유명세는 내 시집에서도 먹혀 들어갔다. 내 아이들의 학력이 뒤쳐지지 않는 것도 조카의 두뇌 덕이라고 했다. 내 머리도 그리 둔하다고는 생각 않는데 한 치도 아닌 두 치 건너서 조카 머리를 들먹이며 외탁 했다고 인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들이 노래 잘 부르는 것도, 아들 녀석 키 큰 것도 모두 외가 덕이라고 남편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모든 것들도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부분이다.
시집 쪽에서는 이렇다 할 인재가 드러나지 않고 밋밋하고도 평범한 것이 마치 ‘티’라도 된 듯이 몸을 낮추는 시댁 식구들에게 미안할 정도였지만 꼿꼿한 가풍만큼은 친정에서도 으뜸으로 쳐 주는 것으로 비겨주었다.
오라버니의 확실한 자리와 조카의 출세가 내 입지를 어느 정도 올려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친정 얘기엔 나도 모르게 고개가 빳빳해 진다.
시댁에서의 내 자리가 불안하거나 쳐지진 않지만 공연히 한 번 더 힘을 주고 싶어지는 속물근성에 한구석 슬며시 민망해 지기도 한다.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유세를 부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에서는 최고의 힘이 되고 있는 건 부인하고 싶지 않다.
이보다 더 큰 힘과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널려 있지만 내 것도 아니고 나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도 아니니 탐할 필요도 없는 남의 것에 불과하다.
내 반쪽이 남의 것 열 쪽보다 더 크고 값지다는 건 상식이다.
내 시어머니는 한국전란 중에 시집오신 관계로 변변한 혼수도 마련할 수 없이 거의 맨몸으로 오셨다. 전쟁 중이기도 했지만 잘나가던 친정도 바닥을 드러내고 몰락하다 보니 혼수는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 ‘흠’ 아닌 ‘흠’은 아흔 넘어서 돌아가신 시조모님 살아생전 까지 꼬리표 같이 어머님에게 달라붙은 ‘흉’이고 ‘상처’였다.
‘버선 한 쪽도 혼수라고 받아본 적이 없다’ 는 독설을 시어머님께 퍼 붓던 시조모님의 서슬에 공연히 내 죄 인양 가슴 졸이며 그래도 혼수라고 챙겨온 내가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단단하게 뭉쳐있던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친정이 보잘 것 없이 몰락 해 버린 것이 결정적인 약점이었고 트집거리였다.
친정붙이 중 한사람이라도 드러낼 자리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무시하고 비하하는 발언은 감히 하시지 못했을 것이다.
50여년을 당하고 사셨을 그 고초는 안 봐도 눈에 잡힌다.
그때 시어머님이 나에게 쏟아 놓은 푸념이 잊혀지지 않는다.
‘ 여자는 친정에 힘이 없으면 시집에서 살아가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네 남편은 힘을 길러서 아래로 딸린 시누이들 입지에 힘을 실어 주라는, 끝내는 당부의 말씀을 누누이 하셨다.
이불 파는 남자가 그랬다.
이부자리하고 처가살림은 넉넉할수록 좋은거라고.
친정의 힘은 곧 내 힘이 되는 세상은 아직도 대를 물리고 있다. 힘은 곧 돈이고 권력이고 명예였다. 친정의 기세가 너무 세면 자칫 남자의 기세가 꺾일 우려가 있어서 며느리는 낮춰서 보라고 했는지 몰라도 너무 기우는 혼사는 가급적 하지 않았으면 하는 내 결혼관은 변함이 없다.
재산과 지위, 그리고 학벌이 혼사의 잣대가 되고 있는 현실에 보폭을 맞추려면 참 힘들다. 혼기가 찬 딸아이를 둔 부모 입장에서 요즘 많은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
딸아이에게 힘이 되어 줄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은데 혼사얘기만 나오면 가슴부터 덜컥거린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혼수문제는 늘 과제로 남겨 놓고 있다.
천문학적인 혼수비를 가지고도 양이 덜 차 전전긍긍하는 그 밑바닥엔 ‘힘’이 달릴 것 같은 불안감을 깔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혼수와 친정의 힘은 곧 내 입지를 부풀리고 반석위에 올려놓는 지름길이다.
뒤집어 말하면 친정의 흠이나 티는 시집에서의 내 입지에 치명상을 입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 반하는 의견들은 있을 것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반론의 여지란 미미한 게 또한 현실이다.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는 여자 몸만 가도 엎어지듯 반기는 나라가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여자 힘이 센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느닷없이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