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는 큰 시누이가 며칠 전부터 딸아이를 소개 팅 시키려고 물밑 작업을 벌이더니 드디어 궁합보러 가자는 말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아직 나이도 그리 많지도 않지만 웬 지 딸아이를 도둑맞는 것 같아 아까워서 선뜻 허락을 하지 않았는데 고모가 중매하면 잘 산다는 속설을 앞세워서 나를 채근했다. 상대는 그야말로 완벽한 조건(?)에 흠 잡을 데가 없는, 우리 집 하고는 게임이 되지 않는 자리여서 썩 맘이 내키지 않았다. 예전부터 며느리는 낮게 구하고 딸은 높이 보내라고 했지만 견주기 어려운 턱이 생기는 혼사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기우는 혼사에 따르는 부작용이 사회문제가 된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꿰고도 남는데 굳이 형틀 메고 형장에 들어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결혼관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탐나는 자리여서 딱 잘라 거절은 못하고 밍기적 거리는 사이에 시누이가 궁합 보러 가자고 신발을 꿰어 신었다.
‘卍’자 깃발이 누렇게 바래진 채로 대나무 장대에 높다랗게 걸려 펄럭이는 대문 앞에 이르러자 나도 모르게 심호흡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살면서 신수나 사주 보러 다닌 적 없이 운명대로 순리대로 살아왔는데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한심한 생각도 들었지만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셈을 염두에 두고 50대 중반의 여인네와 마주 앉았다. 끼고 있는 돋보기 너머로 번들거리는 여인네의 눈빛과 마주치자 까닭을 알 수 없는 긴장에 납작하게 눌린 기(氣)가 맥을 잃고 뒤로 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선고를 앞둔 죄수 같아 눈빛을 어슷하게 피하며 딸아이와 상대방의 생년월일을 대니까 두꺼운 책을 꺼내들고 무언가 혼자서 입에 넣고 우물 거렸다. 한참을 쓰고 지우고를 거듭 하더니 ‘아주 좋은 천생연분’이라고 하면서 혼사를 해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입으로 도는 좋다는 자격조건을 모두 꿰어다가 붙이면서 놓치지 마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좋은 말 뒤에는 항상 ‘but' 가 붙는다. 이쯤에서는 역술인에겐 돈다발이 들어오는 대목인지도 모른다. 공을 들이지 않으면 병마와 이혼수가 들고 아들 녀석도 화가 미친다고 했다. 삼재(三災)가 들어서 피해가기 힘들다고 했다. 공 들이면 방법은 매일 기도를 드리는 것인데 그 일을 자기가 대신 해 줄 테니까 돈을 내라고 했다. 우선은 간단한 기도조로 조금만 받아 놓되 진짜 큰 기도는 돈이 많이 들지만 꼭 해야 한다는, 거의 공갈 협박에 가까운 무서운 선고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이들을 불모로 내 뱉는 끔직한 소리에 밑져봐야 본전이라던 애초의 생각은 이미 날아가 버리고 비자금으로 챙겨간 돈을 내 밀고 부탁 한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곤 제단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이름도 알 수 없는 神들에게 수없이 절을 해 댔다. 그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내 아이들을 지켜 줄 것인가 하는 따위의 사위스러운 의심은 할 수가 없을 만큼 절박한 심정이었다. 자식 얘기에 의연해 지는 부모는 흔치않게 되어 있다. 오래전에 우연히 찾아든 어떤 아낙의 ‘머지않아 대주가 횡액을 당 한다.’ 는 독설도 무시하고 말았는데 아이들 얘기엔 어쩔 수 없이 판단력을 잃고 허물어졌다. 시누이와의 안면이 담보로 되어 있는 여인네는 ‘꼭 해 줘야 한다.’ 는 반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지만 가타부타 대답은 하지 않았다.
좋은 얘기 보다는 나쁜 얘기만 가슴에 넣고 휘청거리듯이 그 집을 빠져 나왔다.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은 나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들어 갈 때의 호기심 반 궁금증 반 그리고 본전은 건진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좋지 않다는 역술인의 한마디 한마디는 이미 내 가슴을 겨누는 시퍼른 비수가 되어 이성과 판단력의 중허리를 토막 내어 버렸다.
시커먼 연기만 가득 들이마시고 미처 내 뿜지 못한 답답한 심정을 남편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했다. 분명 불호령이 떨어질 건 뻔하고 무시하고 있기엔 목에 걸린 뭉치가 숨을 막고 있어서 혼자서 앓아야 했다.
그러나 근본도 알 수 없는 아낙의 세치 혓바닥을 무슨 근거로 믿고 내가 흔들려야 하는가에 회의가 따르기도 했다. 그동안 터부(taboo)시하고 살았던 내 축이 심하게 흔들려야 했던 건 자식 일이기에 앞뒤를 잴 여유가 없었다고 변명을 하고 싶을 만큼 후회도 따랐다. 철학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그네들의 예언을 액면 그대로 믿고 우왕좌왕 할 만큼 흐려져 있는 내 판단력에 화도 났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는 비과학적인 뜬소리에 망설임 없이 내민 돈이 아까운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자기 운수도 점치지 못하면서 남의 운수 예언하는 아이러니에 메스 들이 댈 맘도 없고 이 모순엔 분명 보이지 않는 역학관계가 있음도 부인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내 맘이고 내 믿음이다. 새겨서 잘 들어라는 의미로 귓바퀴가 달려 있다고 한다. 얕은 생각으로 맘이 흔들리면 덩달아서 귀도 얇아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미신도 생겨나고 소위 말하는 점쟁이들 까지도 예언이랍시고 사람들의 귀를 갉아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유명한 노스트라무스의 예언, 즉 1999년 7월에 지구가 멸망 한다는 실체 없는 뜬소리도 부도가 났는데 한낱 보잘 것 없는 역술인의 믿거나 말거나 한 무책임한 소리를 언제까지 마음 한 구석에 박아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훌훌 털어 버리지 못하는 내 성격상 그 망언이 닳아 없어지자면 어느 정도 시간은 걸릴 것이 뻔한데 그때까지 알게 모르게 가슴 죄이고 있을 일이 기가 막힌다.
더 얄궂은 건 손금 보듯이 훤하게 알아 맞추는 부분은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돈 값을 한 것이라고 일축했지만 좋은 말만 믿고 나쁜 말은 믿지 않으면 되는 편리함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누구나 복과 화는 당하게 되어 있는데 예방 차원에서 돈을 쓰라고 하니 아무리 돈의 위력이 무소불위라지만 운명내지는 숙명까지 쥐고 흔들 만큼 영향력이 세다면 무언가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건 팔자려니, 운명이려니 하기엔 안일한 태도 같아서 자꾸만 목에서 뜨거운 침이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