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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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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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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곡(思父曲)


BY 蓮堂 2006-04-19


나에게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사실이 아직은 마음으로도 피부로도 와 닿지 않는다.

아니 사실로 받아들여지질 않는다. 어금니 같은 자식들 남겨두고 홀로 가신다는 건 배신이라고 생각했었다. 남의 아버지는 돌아 가셔도 내 아버지는 안 그러실 줄, 못 그러실 줄로 알고 살았다.

아직도 오빠 집에 누워 계시면서 오가는 자식들 눈으로나마 기억하려고 희미한 웃음 흘리시는것 같았고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빈 머리와 헐렁한 가슴이지만 오래도록 품안에 품고 싶은 맘 하나로 버티고 계신듯 하다. 

감각과 판단기능의 그 오묘한 시스템을 상실하신지 오래지만 나에겐 그 누구보다도 가슴 한켠을 지켜주신 분이셨다.. 오랜 세월동안 삶의 지렛대로 가슴 한 복판을 가로질러 버티게 해 주신 힘이셨고 세로의 축이셨다.

반쪽을 잃어버린 어머님의 그 상심을 자식이라고 다 헤아려 드릴 순 없다. 그냥 입 끝으로 달래 드리는 게 고작일 뿐 자식으로서 해 드릴 수 있는 한계다. 그동안 부모님에 대한 글을 수없이 써댔다. 모두가 부모님 마음 언저리를 겉 돌 수밖에 없는 입에 발린 글들이었지만 막상 아버님을 여의고 나니 부끄럽고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출가외인의 딱지를 교묘하게 이용한 비겁도, 연세 드신 부모님을 여의는 건 당연하다고 입가에 미미한 웃음 흘린 것도 맘에 걸린다.

지극히 상투적이고도 보편적인 명분을 방패삼아 해야 할 앞가림을 은근슬쩍 비켜 간 불효가 아버님을 여윈 그날 이후 인두로 가슴을 지글지글 지져 대는 것 같다.

돌아가시고 나면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살아 계실 땐 왜 한 오라기도 걸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두어 달 내 집에 기거 하시면서 마치 남의 집 인양 마음 불편 해 하신 속내를 조금이라도 헤아려 드리지 못한 것도, 정신 흐리신 아버님 면전에서 멀쩡한 사람인양 취급해서 타박한 것도 평생을 두고 메꾸어 지지 않을 흠집이다.

아버님이 가시던 날 바짝 말라 비틀어져 먼지가 풀풀 날리던 대지를 적시는 봄비가 이틀을 내리 내렸다. 한(恨)이었을까. 아니면 서러움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발가락 힘주며 버티시다가 마지못해 가신 미련이었을까.

하얀 국화꽃 사이로 내민 영정 앞에서 속으로 삼켜야 하는 울음에 체하고 체해서 가슴팍이 아파야 했다. 숨어서 울컥울컥 울음 토해내는 내 형제들의 그 아픈 속내를 또한 못 본 척, 모르는 척 외면해야 했다.

국상이고 호상이라고 위로를 건네는 조문객들의 따스한 말 한 마디조차도 서럽고 야속하게 들렸다. 인정하면서도 인정이 안 되는 모순인걸 알지만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단단한 설움덩어리가 삭아지질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님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드리던 날 하늘이 너무 맑아 눈이 시려서 눈물이 났고 가슴 저미는 서러움에 더 눈물이 났다.

비틀진 야트막한 산에도 계곡을 끼고 하늘 가까이 솟긴 산에도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김소월님이 그러셨지.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린다고.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라고 그랬지.

그 진달래꽃 즈려 밟으시려고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에 홀연히 떠나신 걸까. 베옷입고 꽃신 신고 떠나신 아버님의 흔적이 진달래에 남아 있으려나. 명정청포 앞세워 돌아 올 날 기약 없이 먼 길 떠나셨는데 그곳까지 꽃길이 닿아 있으려나.

길가에 줄지어 늘어 선 노란 개나리의 행렬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저토록 고운 색채를 잊고 사셔야 했던 황폐한 삶에 대한 보상도 못 받고 외상으로 남겨둔 채 서둘러 가셔야 했다. 그리도 급하셨을까. 잊고 가신 것도, 미처 챙겨가지 못했던 것들도 많을텐데 언제 가져가시려고.....

언제쯤 피었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던 하얀 눈발 같은 벚꽃은 무심하게 파란 하늘위로 자꾸만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아버님을 따라 가는 걸까. 영정 위패 모시고 가는 차를 가로막고 긴 꼬리 늘어뜨리며 벌이는 춤사위가 아버님을 결코 외롭게는 해 드리지는 않으려나 보다. 사는 게 바빠서 꽃을 접할 여유조차도 누릴 수 없으셨는데 이젠 모든 짐 다 벗어 버리고 가벼운 몸으로 꽃을 벗 삼아 꽃길을 동무삼아 그렇게 가시려고 숱한 세월 인내하며 그렇게 사셨나 보다.

우리 육남매 탯줄 끊은 곳으로 모시고 갔다.

살아생전에 그토록 가시고 싶어 했던 고향이련만 영정만이 지켜볼 뿐 아무 소리도 아무 내색도 할 수 없으시다. 아버님의 손때 묻은 흔적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라져서 누군가가 심어놓은 유실수만 듬성듬성 서 있는데 이곳에 무슨 미련이 그토록 남아 있었을까.

얼기설기 엮어 놓았던 싸리 삽작문이 서 있었을 법한 곳은 뿌리를 드러낸 잡초 무더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높다란 봉당을 앞으로 내 놓은 본채도, 마굿간이 달렸던 사랑채도 그 흔한 흙더미 한 움큼도 만져볼 수 없을 만큼 낯설었다.

40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그때의 흔적을 아쉬워하는 ‘刻舟求劍’은 아닌지.

내 어릴 적의 고향은 한낱 불편하고 가난을 멍에로 여기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지만 반 백년 가까이 와 보니 아버님이 원하셨던 게 무엇이었는지 이젠 가늠이 되었다.

아버님의 시선이 멈춘 곳, 아버님의 의식이 머문 곳에선 못 다한 한(恨) 꾸러미가 또아리를 튼 채 여든 해를 거치는 동안에도 풀려나질 않았던 게 아닐까.

수십 년 전에 세상 떠나신 할머니가 그립고, 고향을 잊지 못해 어깨 들먹일 땐 같이 울어드리지 못한 매정함이 가슴을 찍어내는 듯 아리기만 하다.

고향의 산하는 그대로인데 우리를 반기는 이 하나 없고 목 축일 물 한잔 얻어 마실 곳 한군데 없는 곳이 고향이었다.

빈집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이 동네에 그나마 남아있던 훈기마저 다 식어버리고 아버님의 영혼이 안주하기엔 너무 추울 것 같아서 빈 동네를 한바퀴 돌 동안에 가슴 안에 일고 있는 데울 수 없는 찬 바람을 아버님은 아실런지.

흙으로 돌아 가시기전에 부처님 전에 모셔두었다.

마흔 아흐렛 동안 비록 육신은 떠났어도 혼은 이승과의 끈이 끊기지 않았기에 가시는 길 편안하시고 좋은 곳으로 모시고자 49재(齋)를 올리기 위해서다.

불교의식을 치루는 내내 말없이 속울음을 삼키는 그 바닥에 깔려 있는 건 ‘이럴 줄 몰랐다’ 가 아니고 ‘ 이럴 줄 알았다’ 라는 참회와 비어버린 아버님의 자리에 대한 그리움 섞인 회한이었다.

일정하게 맑은 리듬을 탄 목탁소리와 낭낭한 스님의 불경 외는 소리엔 전신에서 땀이 비질거리며 배어 나왔다.

오체투지의 흐느낌과 관세음보살 되 내임이 굴곡졌던 아버님의 삶을 잠시나마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나에게 아버지가 안 계신다. 아버지라고 부르면 대답하실 분이 그 어디에도 안 계신다.

자리보존 하고 계실 때는 그래도 희미하게 대답은 하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