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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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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말을 해도 될까


BY 蓮堂 2006-01-31

 

         이젠 말을 해도 될까.



두 살 아래 여동생을 보면 항상 가슴이 내려앉는다. 35년 전의 그 기막힌 비밀을 꿈에도 모른 채 살아가는 여동생의 학력은 중졸이다. 그 동생은 우리 여섯 남매 중에 제일 학력이 낮다. 성격이 온순해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소리를 중학교 다닐 때까지 곧이 곧대로 믿고 엄마 찾아 간다고 한밤중에 집을 나가서 애를 먹이기도 했던 순둥이었다. 삼남 삼녀 중 가운데에 끼어서 아래 위 받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가 약해서 그리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오빠 언니 남동생 여동생 두루 다 갖춘, 어떻게 보면 제일 행복한 자리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제일 만만한 샌드위치가 되어야 했던 동생은 형제들 중에서도 공부를 제일 못해서 항상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동생은 그것이 장래를 좌지우지 한 일이 될 줄 몰랐던 것이다. 솔직하게 나만큼만 성적이 좋았더라도 동생의 장래는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동생이 고등학교 진학 할 무렵 나이 터울이 모두 두 살 차이인지라 난 당시 여고 3학년이 되고 바로 밑에 남동생이 중2 막내 여동생이 초등학교 6 학년이었다. 당시 내 위로 두 오빠 는 군 복무중이어서  - 큰 오빠는 교직에 있다가 입대 - 그나마도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 드렸지만 밑으로 사남매는 부모님의 어깨를 누르는 짐이었다. 동생은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없는 조건들로 인해서 희생이 되어야 했다. 그 조건이란, 여고 졸업반인 나를 중도하차 시킬 수 없었고 그렇다고 중학교 다니는 남동생을 끄집어 내릴 수도 없었던 조건들이었다.

동생이 여고 입시고사를 치루고 나서였다. 은연중에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엿듣게 되었다.

‘ㅇㅇ이는 합격을 해도 고등학교 못 보낸다. 후회 안하게 시험이나 치루 게 하자. 떨어 졌다고 하면 된다’ 는 부모님의 가슴 아픈 음모(?)를 듣고 난 뒤에 난 가슴이 떨려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님이 원망스러웠고 동생이 불쌍했다.

공부가 조금 뒤떨어 졌지만 그렇다고 시골 고등학교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동생은 고등학교 갈 꿈에 부풀어서 발표나기만 기다리다가 ‘떨어졌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며칠을 두고 울었다. 영악스럽지 못한 동생은 합격여부를 직접 알아 볼 생각도 안하고 부모님이 전해 준 불합격 소식만 믿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동생은 합격을 하고도 진학을 못했다. 이 사실은 부모님과 나만 알 뿐이다. 난 자퇴를 하고 싶었다. 내 자리를 동생에게 주고 싶었지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꿰고 있었기에 맘뿐이었다.


조그마한 자영업을 하시던 아버님은 그때 당시 불어 닥친 오일쇼크와 빌려준 돈을 돌려받질 못해서 가세가 기울어졌지만 자식 교육만큼은 시켜야 된다고 강조 하셨던 분이시다. 그런 아버님이 동생교육을 포기하실 정도면 그 심정이 어찌 하셨을까를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중학교만 졸업한 동생은 순순히 또래 아이들 대여섯 명과 함께 안양 방직공장에 취직을 했다. 동생을 공장으로 보내기 하루전날 피를 토하듯 우시던 부모님의 그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식음을 전폐 하시던 어머님은 동생에게 지은 죄는 죽어서도 못 갚는다고 매일 눈물로 날을 보내셨다. 다행이 동생은 공장 일에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맘이 놓였지만 부모님과 내 가슴 한 복판에 깊게 패여 진 구덩이는 점점 커져 가기만 했다.

동생이 첫 월급 받았다고 가족들 낱낱이 선물 보내왔을 때 영문을 모르는 동생들은 좋아라 했지만 난 숨어서 울어야 했고 부모님은 그 선물 꾸러미에 손도 대지 않으셨다.

여고를 졸업한 난 이년 후에 공직(당시 5급 공무원 지금의 9급)에 발을 들여 놓고 보니 내 초봉이 입사한지 몇 년 된 동생의 월급보다 많았던 것도 또한 내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야근까지 하는 동생의 월급은 정말 보잘 것 없었지만 내 돈 보다도 몇 백배 더 값지고도 귀한 돈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년 동안 백수로 있는 나에게 몇 번인가 용돈이라고 보내온 돈을 받아들고 염치없고 미안하고 가슴 아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중에 은혜를 갚았는지는 기억이 없다.

아버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ㅇㅇ이가 못 배웠다는 이유로 시집을 잘 가지 못 한다면 내가 죽어서도 눈을 못 감는다.’

나도 그랬다. 동생이 나보다 더 좋은 곳으로 시집가기를, 그래서 못 배운 한을 남편 잘 만난 것으로 풀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못 배운 탓에 시집가서 고생 한다면 나 자신도 견딜 수 없이 괴로울 것 같았다. 아무리 운명이고 팔자라고 하지만 인위적으로 턴(turn) 시킨 그 책임만큼은 회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대학 나온 똑똑한 남편을 중매로 만났다. 동생의 헌칠하고도 서글서글한 인상이 점수를 높여 주었다. 아버님의 몇 차례의 까다로운 커트라인에 걸린 제부(弟夫)는 지금 금융기관의 상무로 재직 중이며 똘망똘망한 일남삼녀의 엄마로 구김 없이 살고 있어서 내 맘도 비할 데 없이 흡족하다. 동생은 못 배운데 대한 컴플랙스는 드러내지 않았다. 시험에 떨어졌으니까 당연히 진학을 못했다고 믿고 있다. 어느 누구도 원망 않고 순리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아직도 부모님이 생존해 계셔서 차마 동생 가슴에 불 지필 수는 없지만 늘 공범자의 그 죄책감은 쉽게 떨쳐지질 않는다.

지금에야 이 사실을 안다면 동생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지만 영원히 덮어 두련다.

영원한 비밀은 입도 귀도 열리지 않아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