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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그림자가 자꾸만 내 목을 누르는 바람에 버둥거리다가 놀라서 잠을 깼다. 그러나 알고 보니 목을 눌린 사람은 아버님이셨고, 아버님은 나를 향해서 자꾸만 손을 내 저으면서 멀리 가라고 호통을 치셨다. 뻣뻣해 진 것 같은 목 줄기를 두어 번 쓰다듬고 나서 안방에서 주무시는 부모님에게 생각이 미치자 퉁기듯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내가 우겨서 오라버니 집으로부터 부모님을 보쌈 해 온 만큼 그에 따르는 책임도 컸기에 안방에 모셔둔 이후로 밤에도 항상 귀가 열려 있어야 했다. 오라버니 집에 계실 때는 한밤중에 깨서 온 식구들의 잠을 빼앗곤 하시던 아버님이셨는데 웬일인지 내 집에 오신 이후로 불안할 정도로 조용 하셨다. 엄마를 귀찮게 하시지도 않았고 먹을 걸 달라고 조르시지도 않고 줄곧 잠만 주무시는 게 내가 깊은 잠을 들이지 못하는 이유였다. 혹시라도 주무시다가 숨이라도 막혀서 불상사를 빚지나 않을까. 정신이 맑지 않으시니까 의사 표시도 제대로 못하시는데 말문이 막혀서 갑갑해 하시 않으실까..... 잠자리에 들 때면 방정맞은 생각이 한 귀퉁이 틀어 박혀서인지 아닐 거라는 부정을 하지 못하게끔 너무나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온 신경이 안방으로 쏠려야 했다. 한밤중에도 몇 번을 들여다봐야 안심이 되었고 식사라도 그르시게 되면 불안해서 내가 더 허둥거려야 했다. 작은방은 어른들이 거처하시기에 답답하고 비좁아서 안 되니까 안방을 내 드리자고 하는 남편의 말이 너무 고마웠다. 그러나 난 필요이상으로 엄마에게 뚝뚝하게 굴어야 했다. 나보다도 더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남편이 너무 고맙고 염치없어서, 또 그렇게 해야만 돌아가신 시부모님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아서 남편이 보는 앞에서는 살가운 딸 노릇 하지 않아야 했다. 시부모와 친정부모와의 차이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간격이 크다는 걸 실감하고 보니 많지 않은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수년전에 세상을 떠나신 시부모님 생각에 늘 목줄이 아프다. 왜 그런지 내 도리와 책임을 중간에서 그만둔 것 같은 미직지근한 죄책감이 친정 부모님을 대할수록 머리를 찍어 내렸다. 만일에 시부모님이라면 내가 이렇게 한밤중에도 일어나서 안위를 살펴 드리고 가슴앓이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랬을 거라는 답을 내 스스로 내리기에는 너무 몰염치다. 의무와 도리가 결코 핏줄에 대한 감정을 앞지르지 못함을 굳이 핑게 삼을 수밖에 없다.
안방 문을 밀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님의 고르지 않은 거친 숨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문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창문을 가르고 들어온 가로등 빛 속에 희끄무레하게 드러난 두 분의 모습은 항상 내 몸을 적셔 놓았다. 결혼 한 이후로 난 단 한번이라도 말짱하고도 마른 눈으로 부모님을 바라 본 적이 없었다. 눈가는 늘 그렁거렸고 진딧물 낀 잎사귀 같이 가슴은 조그맣게 오그라들기만 했다. 좋으면 좋은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감정을 조절하는 시스템이 멈춰 있었기에 눈물 쏟는 한 가지만 작동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청승이라도 좋고 오버액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복받치는 감정 추스릴 자신도 서 있지 않았기에 뿌리에서 줄기를 타고 오르는 물줄기 같은 아픔이 가슴부터 적시고 나면 굳어있던 슬픔 덩어리가 가눌 수 없는 무게로 늘어나서 그대로 부모님 옆에 주저앉아서 눈물을 쏟아 놓게 된다. 아무리 퍼내어도 나의 이 작은 가슴안의 물줄기는 쉽게 말라들지 않을 것 같다. 발끝으로 몰려가 있는 이불을 끌어 당겨서 어깨까지 덮어드리자 실눈을 뜨신 아버님이 멀거니 쳐다보시며 입 자위를 움직이셨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입놀림이 답답했지만 아버님의 눈빛은 많은걸 담고 계셨다.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녀. 이젠 나를 집으로 보내다오' '도장골...도장골이.....가고 싶다......' 아들집을 떠나오신 게 못내 불안하신지 항상 돌아갈 맘을 바닥에 깔고 계신 듯 맑은 정신이 들 때면 늘 집으로, 고향 도장골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어눌하게 띠엄띠엄 하시곤 했다. 떠나온 고향집에 대한 환상으로 헛소리를 하실 때면 항상 바늘 끝을 가슴에 대고 있는 불안함으로 아버님을 다독였지만 어디까지나 딸네 집은 객지이고 남의 집이라는 관념은 바뀌지 않았다. 촛점이 한군데로 모아지지 않는 회색동공이지만 팔십 년 넘게 지녀온 그 서릿발 같은 심지는 조금도 닳지 않고 눈 속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기도에 이상이 생겨서 음식물 삼키려고 하면 동반된 기침과 재채기로 인해서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병적으로 식탐을 하셔서 늘 내 가슴을 후벼 놓았다. 단순한 생리작용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시지만 나에게는 그 옛날 무소불위의 아버지만 각인되어 있어서 이 현실이 긴가민가로 햇 갈리기도 했다.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버님의 얼굴을 내려보다 나도 모르게 해울음이 터져 나왔다. 쩌렁쩌렁 하시던 원래의 모습과 지금의 초라한 모습이 매치가 되지 않아서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은 건 딸의 욕심일까. 아버님이 최대한으로 움직여서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은 컨디션이 좋은 날은 엉덩이걸음으로 안방 옆에 붙은 화장실 문 앞까지는 간신히 가시지만 거의 어린아이 배밀이 하듯, 벌레기어 가듯 하시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는 지느러미 잘린 물고기마냥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드러누우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쏟아내는 눈물은 아버님의 얼굴과 가슴을 덩달아 적셔놓기 일쑤였다. '내 아버지가.....내 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내방에서 시한부 같은 삶을 위해서 고르지 않은 숨 내 쉬어야만 할까......' 시퍼른 서슬, 대쪽같은 성정, 빈틈없는 사고, 그러나 자상하시고 정이 많으셔서 자식 사랑 남달랐던 내 아버지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릎 꺾고 허물어져야 했다. 훌쩍이는 내 소리에 반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시는 촛점 잃은 회색동공이 잠시 일렁이는 것 같았다. 허공을 젓던 아버님의 힘없이 떨리는 손이 내 등을 어루만지시면서 두어 번 토닥이자 가슴속에 팽창해 있던 통곡이 실밥 터지듯이 미어져 나왔다. 무엇인가를 감지하신 듯, 그 무언가에 맘이 닿았는 듯 아버님은 나를 위해서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성의를 보인 것 같기에 내 설음덩이의 반경은 더 크게 넓어졌다.. 영원히 보내 드려야 할 날이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게 너무 무섭고 떨렸다. 주무시던 엄마도 언제 일어 나셨는지 그림자 같이 조용히 곁에서 지켜보고 계시다가 우는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나무라신다. "자다가 우는소리 내면 흉하고 해롭다. 이제 그만 가서 자거라." 엄마에게 등을 떼밀려서 방을 나왔지만 쉽게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다. 곤하게 자고 있는 남편에게 울던 모습 들킬세라 숨을 죽이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인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에 갔다가 구입한 국악 명상음악이다. 우리의 전통악기인 대금(大芩)과 소금(小芩), 그리고 오보에(Ob)일종인 목관악기 잉글리쉬 혼이 조화를 이룬 이 명상음악은 맘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어서 요즘같이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조여 올 때면 밤새도록 귀에 꽂고 아침을 맞는 날이 많았다. 아녀자의 간들거리는 허리를 연상케 하는, 가늘게 떨리는 듯 맑고 높이 오르는 소금의 선율에 파들거리던 눈두덩이도 뻑뻑하던 목 줄기도 흥건하게 젖어있던 가슴도 차차 느슨해지며 말라들기 시작했다. 가슴 앓이도 참고 참으면 내성이 생겨 무덤덤해 진다는데 이 아픔이 어느 싯점이면 잦아들어서 남의 얘기인양 입에 올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감당 할 수 없을까봐 두렵기만 하다
슬픔의 끝은 늘 바닥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 스스로 바닥이라고 여기면서 발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덜먹 거리는 어깨 울음도 목 줄기를 누르는 해 울음도 모두 삭힐 수 있으리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