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난 생각하는 게 있다.
내가 여우일까 곰일까....................
하는 짓은 곰과 더러 비슷할 때가 있으나 생긴 건 여우과에 속하니 말이다.
단군신화에도 나오지 않는가...
백일동안 마늘만 먹고 여자가 되었다는 熊女의 정체는 역시 곰이었으니 난 그 신화의 母胎를 일부 흉내내고 있는데 불과하지만 곰같이 미련을 떠는 것도 아니고 여우같이 영악하고 잽싸게 생겨 먹은 것도 아니다.
때에 따라서 곰과 여우의 탈을 번갈아 써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어지중간 한 짐승을 꼽을려고 해도 마땅히 물망에 오르는 '감'이 없다.
굳이 곰과 비교되는 부분은 딱 한가지가 있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입을 다문 채 상대를 안하고 '배 째라'로 나오던지'죽여줍쇼'하고 머리 들이민다.
해명이나 변명이 통하지 않을 때는 남이 뭐라 든 스스로 곰임을 자청한다.
그게 후환이 없고 복장이 편하다는 건 여러 경로를 겪어본 나머지 내린 결론이다.
'생긴 건 여우 사촌 같은데 우째 저리 미련을 떠누......'
'二步전진을 위한 一步후퇴'라는 여우 특유의 처세술이라는 거 알고 있는 사람 얼마나 되려나...
오랜만에 촌년이 한양엘 갔다.
서울특별시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속이 메슥거리고 하늘색깔이 진회색 빛을 띄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지 서울에 대한 내 선입견은 '사람 살 곳이 못된다'는 한쪽으로 몰려있는 편견을 앞세우고 하루라도 더 유할 생각은 눈꼽 만큼도 안하고 머리를 내 둘렀다.
복잡하고, 울컥거리는 가솔린냄새 그리고 시끄러운 소음으로 인해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지병을 얻고 있다가 쫓기듯이 내려와야 했다.
남편은 내가 별스럽다고 타박을 했지만 흙 밟고 소백산 공기 마시며 여유작작하게 사는 내 취향하고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번번이 유난을 떨었다.
눈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살벌한 서울에서 용케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니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모두가 여우처럼 깍쟁이 짓 안하고는 불가능 할 것 같았다.
그러니 나 같은 곰 체질은 일찌감치 촌에서 고향이나 지키는 등 굽은 소나무 노릇이나 해야 했다. 서울이 무서우면 과천서부터 긴다고 했는데 난 집을 나서면서부터 박박 기는 무지랭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편 주머니 털고 싶어서 백화점엘 갔다.
이것저것 눈요깃거리도 많고 새로운 상품에 대한 정보도 얻고 싶어서 눈알 팽팽 돌아가는 넓은 백화점 매장 안을 돌아다니는데 묻어서 따라 다니는 남편의 표정은 죽을상이다.
남편의 입맛하고 내 입맛은 이미 鹽度(염도)나 甘度(감도)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매장마다 기웃거리는 내 행세가 눈에 거슬렸나 보다.
"이봐.........대충 좀 보고 가지......다리가 아파 죽겠구먼 ....."
두 다리를 연신 꼬는 시늉을 하기에 미안한 맘이 들어서 입 막음도 할겸 남자 옷 파는 매장으로 갔다.
반색을 하며 반기는 매장 여직원에게 남자 바지를 보여 달라고 했더니 체크무늬가 있는 감색 바지를 골라주며 잡은 고기 놓칠세라 입에 침을 발라가며 권했다.
"아유...사모님 이거 사장님께 딱 입니다..사세요..."
말단 월급쟁이가 사장으로 승격되기 엄청 쉬운 곳이다.
남편도 어느 정도 맘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창자 속에서부터 기어오르는 장난기를 쏟아냈다.
"이봐요..바지 잘못 샀다간 당신 마누라 맘에 안 들면 우짜요?"
매장직원과 남편의 두 눈이 동시에 벌어지며 뜨악해서 날 쳐다봤다.
"부부사이가................아니세요?............"
먼저 입을 연 매장 직원은 긴가민가로 일관하다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던지 깍듯이 사과를 했다.
"그렇게 보여요?..이상하게 다들 그렇게 보네...우린 전생에 뭐가 있나보네..."
얼굴색 하나 고치지 않고 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버금가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입가엔 失笑가 실렸지만 눈자위는 오르락 내리락 했다.
"죄송해요..하도 다정하게 보이시기에.........."
그러면서 별로 세련되어 보이지도 않는 이 두 남녀의 사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 일 줄이야 하는 속은 기분을 털어 내기라도 하듯이 태도가 달라졌다.
어떻게든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더 비싸고 디자인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걸로 권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남편이 비싸다고 거절을 했더니 매장직원을 샐샐 웃으면서 나를 보고 도움의 눈짓을 보냈다.
아하!!.연애질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비싸고 고급스러운걸 선호 하나 부다......
"우리 마누라 알면 혼나는 데....더 싼 걸로 주쇼........"
어느새 내 장난에 편승한 남편의 너스레에 매장직원은 갈피를 못 잡는 지 자꾸 쳐다보며 탐색을 했다.
미리 골라놓은 바지보다도 더 마진률이 높은 고급 바지를 자꾸 권하면서도 내 아래위로 훑어보는 부지런함을 보이는데 속으로 웃음 참느라고 두 볼이 팽팽하게 당겨왔다.
"요즘 romance gray는 이런 스타일 좋아하나요?"
노골적인 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는 직원이 딱해 보였지만 번복하는 것도 사람 꼴에 미치지 못할 것 같아서 처음 골라 놓은 바지를 사 가지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다른 직원하고 둘이서 우리가 가고 있는 뒷모습에다가 눈을 박고 뭐라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남편이 눈알에다가 등잔같이 불을 켜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이 사람이 이제 하다하다 별 짓 다하는구먼...."
"좋으면 좋다고 하슈..그 나이에 나 같은 여자 앤으로 두기 쉬운 줄 아슈?....."
썩어도 준치라고....
그렇게 비위 상하면 왜 그 자리에서 자수를 안 했냐고 몰아 부치니까 마누라 거짓말쟁이 만들기 싫어서 그랬다고 한다.
웃겨...
그게 아니고 그 나이에도 능력 있음을 은근히 과시할려고 그런 게 아니냐고 생트집을 잡아 보았다.
"이 사람아 그건 내 능력이 아니고 자네 능력이야........."
곰인 줄 알았두만 그래도 여우 짓 할 때가 있구만........
남편이 백화점 문을 나서면서 나에게 던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