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이가 누군가와 긴 통화를 하고 나더니 회색이 만연하여 팔짝팔짝 뛰었다.
"엄마 ...엄마.. 냉장고 하고 세탁기 해결 되었어요"
자취 살림 마련 할려고 동분서주 하고 있는 나에게 제발 새것은 장만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 하였으나 남편이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새것을 사 줄려고 했을때 딸 아이는 펄쩍 뛰었었다.
자취살림 너무 완벽하면 스스로 마련할 기회마저 박탈한다는 핑게로 중고를 고집했었다.
그러더니 여기저기 수소문 한 끝에 친구가 쓰던걸 얻기로 했다고 좋아 어쩔줄 모른다.
그러나 며칠뒤, 얻기로 한 냉장고를 도둑 맞았다는 비보(?)에 딸아이는 낙심 천만의 표정을 지었지만 세탁기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라고 은근히 생색을 내었다.
남편이 1톤 화물차를 빌려서 아이의 살림을 싣고 세식구가 옹크리고 짐차에 올랐지만 기분은 날씨 만큼이나 화창했다.
화물차를 처음 타 보는 딸아이는 신기한 듯 차 안을 구석구석 살피고 의자의 쿳숀을 실험하듯 앉아서 엉덩이를 덜썩거리며 철부지 아이같이 굴었다.
'아고....저게 그래도 선생님이라고............'
아이를 쳐다보는 눈길은 걱정스러움과 대견함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세탁기를 주기로 한 친구가 충주에 있다고 해서 충주까지 갔다.
작년부터 교직에 있던 친구의 자취방은 2층인데다가 모퉁이를 한바퀴 돌아서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자그마한 세박기인줄 알고 별 걱정 안했던 나는 곰같은 몸통의 물건을 보니 기가 막혔다.
기가 막힌건 나 뿐만 아니고 남편도 아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놀라는 그 뒤에는 좁고 가파른 2층 계단을 힘없는 여자들과 같이 끌고 내려 갈 일이 아득했던 남편의 표정은 낭패로 일그러져 있었으나 안가져 간다고 할 수가 없었다.
더 맘에 안드는 건 년식이 오래된 물건 같애서 맘이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와서 그냥 돌아 간다는게 딸아이나 친구 보기에도 좋은 그림은 아닌성 싶어서 마지못해 가져 가기로 했다.
2층에서 밑은 내려다 본 계단은 마치 법주사 가는 길목의 말티고개를 연상케 했다.
올라 올 때는 몰랐는데 내려다 본 계단의 길이는 엄청 길고 통로도 좁아서 맥이 빠졌다.
친구는 미안하고 민망해서 '어떻게 끌어내지요??.........'만 연발할 뿐 힘 보태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탁기 밑둥치를 딸아이와 내가 잡고 위에서 남편이 밀어주는 식으로 한 칸씩 걸음마 시키면서 바닥까지 내려 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좁은 통로에 긁히고 귀퉁이가 깨어져서 세탁기나 사람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내려오는 통로가 세탁기 폭과 맞먹어서 손 하나 들이밀 공간도 없이 빡빡해서 시멘트에 긁힌 옷은 보기가 흉했으나 친구가 미안해 할까봐 내색도 할수 없었다.
애초에 공짜라고 했으나 아빠가 안 계신 형편이 어려운 친구라는 딸아이의 귀뜸에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어서 억지로 5만원을 주머니에 찔러주고 오니 그래도 맘이 편했다.
딸아이는 싸게 사서 좋고 친구 도와줘서 좋다고 한껏 재잘 거렸다.
금요일 오후에서 일요일 까지는 백수에 지나지 않은 군바리 아들녀석도 불러 내렸고, 딸아이가 불러낸 고급 일꾼(?) 둘이 완전무장을 한 채 짐을 내리고 있었다.
1톤차에 여섯명이 달라 붙어서 짐을 내리는 데 갑자기 ' 허억 !'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섯명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는데 비명을 지른 사람은 딸아이에 의해서 일꾼으로 차출된 의사 선생님이었다.
치과대학을 나와서 보건소에서 公醫로 근무하고 있는 야학동료였다.
뒤이어 터져 나오는 아들 녀석의 'Oh, My God!!'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겨?
세상에.........
그 어렵게 운반해 온 세탁기의 호스와 뚜껑이 달아난 채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모두들 벌어진 눈과 입이 세탁기의 입과 사이즈가 맞먹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어느 누구도 입을 떼지 않고 멀뚱이 세탁기의 벌어진 입속으로 시선을 박고 꿈적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간겨??..이 뚜껑이??
소홀히 짐 꾸린 남편에게 내 타박이 고스란히 돌아갔는 데 딸아이는 죽을 상을 하고 있었지만 '오 마이 갓'을 외치던 아들 녀석이 키득 거리며 웃음을 쏟았다.
"넌 이 형편에 웃음 나오냐?......."
딸아이는 하얗게 눈을 홀겼고 제일 처음 발견한 의사 선생님은 마치 자기가 저지른 죄인양 입맛만 쩍쩍 다셨다.
돈 5만원은 친구 용돈 준 셈 치자고 했지만 장시간 힘빼고 고생한 거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결국은 쓰레기 수거비용 물어가며 쓰레기 싣고 온 셈이 되었다.
애석해 하는 딸아이가 보기 안되어서 속에 든 말을 했다.
"만일에 그 뚜껑이 날라가서 뒤에 따라오는 차에 맞았다고 생각 해 봐라.. 끔찍 하잖니?"
내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 운수가 기가 막히게 좋은 이삿날이었다.
결국은 냉장고와 세탁기는 남편의 바램대로 새것을 구입했다.
게도 구럭도 다 놓친 딸아이는 아뭇 소리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