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도 남편이 어렵다. 불편한게 아니고 편하지가 않다. 겅충겅충 몇칸쯤 벌어진 나이 탓이 아니고 애초에 길을 잘못 들인 탓이리라.
아버님의 커트라인에 걸려든 운 좋은(?) 남자인 만큼 내가 기대한것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처음부터 난 남편 앞에선 숨소리 조차도 낼수 없을 만큼 남편은 위엄이 섰다. 이리가 범을 만났으니 꼬랑지 내리고 납작하게 엎드릴수 밖엔 없었다.
남편이 무서운게 아니고 내 스스로를 내가 닥달을 한것 같았다. 남편의 눈빛 하나 토씨 하나에도 난 소홀 할수가 없었다. 기분을 살펴야 했고, 눈치를 봐야 했고, 감정을 조절해 주어야 했다. 내 할 도리에서 벗어나면 난 죄인이 되는줄 알고 현실과의 타협에 비협조적으로 나와야 했다.
곰팡이가 득실 거리는 시집의 분위기가 내 목을 눌렀고 발자국 소리 조차도 일일이 체크를 하는 어른들과 남편의 눈길이 항상 내뒤를 따라 다녔다. 자연히 난 바닥으로 내려 앉아서 머리 조아리고 목청 죽이는게 내가 할일이었다.
그것이 20년이 넘게 내 울타리 안에서 나를 가두어 놓았다. 삽작문 열어 젖히고 까치걸음 내 디딘다는 것 조차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탈출구가 없었다.
내 생활은 항상 원을 그렸다. 돌고 돌아서 어느 한 귀퉁이 걸터 앉을 모서리 한켠 보이지 않는 밋밋하고도 마디가 없었다. 갑갑하다는 생각조차도 사치라고 여겼던 내 과거였다.
어려운 시집 식구들 속에서 부대끼고 삐걱거리던 생활이 나의 전부가 되었다. 화가나도 삭여야 했고 울고 싶으면 숨어서 어깨 들먹여야 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법이 없었던 무심한 남편이 나에게는 남이나 다를바 없었다. 편안하게 대화하고 ,우아하게 분위기 잡고, 재미있는 농찌거리는 남이나 하는 일이었다.
자연히 남편하고는 격이 생겼다. 해야 할 일 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더 많았다.
아직도 난 남편 앞에서 속옷을 갈아 입지 못한다. 남편 앞에서 생리적인 작용도 할수 없었다. 어쩌다가 코를 골았다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 거렸다. 등 들이밀고 때 밀어 달라는 소리 할수가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나서 언쟁을 벌여도 그 흔한 욕지거리 한번 하지 못했다. 내 스스로 친정 간다는 소리 조차도 하면 안되는 줄 알고 살았다.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말아야 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했다. 집안에서 여자가 언성 높히면 대들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발소리 내며 걸으면 '무슨놈의 여자 발소리가........'로 타박을 받아야 했다. 빨리 걸어도 흠이었고 큰소리로 웃어도 티를 잡혀야 했다. 거부하면 맘이 불편했다
이게 家和萬事成의 기본이고 의무이자 책임인줄 알고 살았다.
이젠 내 할소리 다 하고 살아라는 남편의 하해같은 은총도 유효기간이 지난지 오래였다. 하라고 등 떼밀어도 굳어버린 사고(思考)와 혀가 부드럽게 풀어질 리 없다. 그냥 굳어진 채로 하던 짓 그대로 하는 게 더 편했다.
남편은 내 앞에서 할짓 다하고 보일것 다 보이고도 당당하다. 구김이 없고 접힌곳 없이 편안하게 남편 노릇 다 하고 사는데 비대칭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소금에 절여진 풋배추같이 힘이 없고 탄력이 떨어졌다.
나이가 들수록 남편에게선 오뉴월 수양버들 같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훈기가 돈다. 그럴수록 내 가슴 한귀퉁이서 불기 시작하는 바람이 점점 차가워 진다. 가끔씩 서리가 하얗게 끼이도록 냉정해 질려고 할때엔 나 스스로가 겁이난다. 내가 살아온게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다시 마음 다둑이며 남편의 품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해야 했다. 그러나, 난 아직도 남편이 편하지가 않다.
남편은 나를 무지 사랑한다고 한다.....딸아이의 말이다. 입으로 하는 사랑 보다는 가슴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게 더 깊고 흔들림이 없다고 하더란다. 그 말에 속고 속아서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 같다.
난, 입으로도 마음으로도, 가슴으로도, 남편을 흔들림없이 사랑하고 있는지 해답 없는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