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나 데모 행렬을 보면은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요구나 시정 사항이 있겠지만 주변에 끼치는 민폐로 인해서 큰 호응을 얻지 못할때가 많다
그저게 있은 LG 칼텍스의 경우를 보더라도 너무 섬찟하다.
회장에 대한 참수나 고 김선일씨에 대한 페러디는 한마디로 경악 그 자체이다.
이 부정적이고 반 사회적인 행태를 성토하면서 문득 30여년전의 나의 시위가 생각났다.
1973년 예비고사 치루던날,
예비고사를 치루지 않는 학생은 모두 등교 하라는 족보에도 없는 학교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예년 같으면 시험 안 치루는 학생은 등교를 하지 않는게 관례였는데 무슨 도깨비같은 지침인지..
궁시렁 궁시렁 불만을 터뜨리며 등교를 한 친구들은 모종의 모의를 시도 했다.
즉, '토.끼.자....'라는 겁없는 행동에 들어갔고 급기야는 우리반 학생 60여명이 말 그대로
교문 밖으로 36계 줄행랑을 쳤다.
교문을 지키던 수위 아저씨는 까무라질듯이 뒤 쫓아오시는 시늉을 했지만 어디 잡힐 친구들인가.
뿔뿔이 흩어져서 우리반 전원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난 그때 친구가 마침 맹장염 수술을 해서 병원에 누워 있는 관계로 병원으로 몸을 숨겼다.
학교는 물론 J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라디오 J방송에도 속보로 나오고 시내에는 경찰관들이 좌악 깔렸었다.
'ㅇㅇ여고 교복 입은 학생은 무조건 잡아 들이라' 는 지시가 각 지 파출소로 하달 되었고
우리집으로 경찰이 찾아오고 전화통이 불나고.........
말하자면 사상 초유의 여고생 생포작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어정쩡하게 시내에서 얼쩡거리던 친구들이 몇이 잡혀 들어가서 매타작을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병원에서 들어보니 슬슬 겁이나고 몸이 오싹거렸다.
집에가서 아버지에게도 벼락을 맞을 것이고 학교가서는...............에구.....
쓸데없이 왜 그런 엄청난 일에 끼어 들었는지 후회 막급이었다.
그나저나 날이 새면 역사가 바뀔지도 모르는 데.......
아버지에게 벼락 맞는건 그래도 겁이 덜 났다.....범이 새끼 잡아 먹는 법은 없으니.....
죄없는 담임 선생님께서 당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고.......
그렇다고 반 전원을 퇴학 시키겠냐?............제대 말년에..........
별일 있겠냐고 나름대로 호언하면서 등교를 했더니--사실 학교 가기 싫었다.
서슬이 시퍼런 재단의 임원과 교장선생님이하 학생과장, 훈육주임, 교련선생님.....등등
그리고 死色이 된채로 조마조마 지켜 보고 계시는 불쌍한 우리 담임 선생님.
한마디로 칼 휘두르는 망나니 앞에서 목 빼고 앉아 있는 그 기분....
주동자 나오라는 교감선생님의 칼날같은 서슬에 모두 다 입을 다물었다.
사실 뚜렷한 주동자도 없이 모두 입을 맞춘 시위였는데 누가 형틀 메고 형장에 들어 가겠냐고...
끝내 주동자 색출에 실패한 학교측의 분노는 알게 모르게 삭아지는것 같았는데......
1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교무실로 오라는 급사의 전갈이 불길했다.
숯덩이 안고 교무실로 들어가니 교감선생님의 시선이 곱질 않았다.
"너냐?니가 주동했냐?"
대뜸 쉼표 마침표 다 잘라먹고 속살같이 다구치는데 등에 땀이 배이는걸 느꼈다.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했지만 여엉 찜찜한 눈초리를 거두시지 않았다.
교감 선생님이 나를 지목해서 다구치는 이유를 모르는게 아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날보고 예비고사라도 봐서 학교의 합격률을 올려 달라는 학교측의 제의를 거절했었다.
아마 그래서 괘씸죄에 걸린게 분명하다는 판단이 서니까 더 속상하고 약이 올랐었다.
이 헤프닝 이후 졸업할때까지 두어달을 난 미운 오리새끼마냥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었다.
30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그래도 슬며시 웃음이 번진다.
당시에는 작두날에 고개 들이민것 같이 불안하고 공포에 떨었겠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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