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동서를 경쟁대상이라고 한다.
남편의 지위나 富의 정도, 또는 학벌이나 집안에서의 입지 심지어는 외모나 성격까지도
서로 우열을 놓고 보이지 않는 시기와 은근한 질투로 곧잘 틈새를 벌인다.
자칫하면 형제들끼리의 우애를 갈라놓기도 하고 붙혀 놓기도 하는 아주 미묘한 관계다.
시부모하고의 갈등이야 속된말로
'범이 지 새끼 잡아먹으랴'라는 말로 갈등의 폭을 압축 시킬수 있지만,
동서간에, 즉 형제간에는 같은 서열이라는 수평관계가 교차점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보다 동서 시집살이가 더 맵다고 꼬집어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시집에서의 유일한 아군(我軍)일수도 있는데.......
나에게 친동서는 사슴을 닮은 마흔두살 짜리 하나 뿐이다.
그러니까 친동기 이상으로 난 이 동서가 이쁘고 힘들게 일하면 내 맘이 아프고 또 미안했다.
시동생하고 연애를 할때에 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남편보다도 더 보수적인 시동생에게 서울 토박이의 깨어있는 사고를 가지고 있는 동서가
곰팡이 소굴인 우리집에 시집와서 과연 잘 견뎌줄까를 생각하니 불안했다.
시동생에게 시선 한번 주지않고 버티던 동서가 무너진 이유가 참 단순했다.
시동생이 유럽 출장가서 국제 전화를 건게 동서의 맘을 움직인 것이라고 했다.
그 정성이 갸륵해서 허락했다나 어쨌다나....
결혼 허락 받을려고 처음으로 시부모님께 인사하러 왔을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했다.
짧은 반바지에 몸에 달라붙은 티셔츠를 입고 겁없이 대문을 들어서자 난 기겁을 했다.
어른들 볼세라 내방으로 데리고 와서 내옷을 입혀서 인사를 드리게 했던걸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 식은 땀이 다 난다
그걸 그냥 지나친 시동생이 아무래도 눈에 콩깍지가 씌우긴 씌웠나 부다.
시집와서 전혀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게 동서로서는 고역이었다.
같이 부대끼며 사는건 아니더라도 가끔씩 대소사에 참석할려면 힘들어 하는게 눈에 보였다.
동병상련의 그 심정을 알기에 손윗 동서라는 자리를 버리고 같은 여자로서 난 본심으로 대했다.
왠만하면 시키지 않았고, 시키더라도 방에 앉아서 하는일이나 쉬운일만 골라서 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손윗동서라고 많이도 어려워 하더니 차츰 나를 대하는게 편해 보였고,
어쩌다가 시집에 오면 내 뒤만 졸졸 따라 다니면서 나를 의지 하는게 눈에 보였다.
맞벌이를 하다보니 조카녀석을 내가 데리고 자면서 키워야 했었다.
내자식 이상으로 사랑을 쏟으며 키운 조카녀석이 어느 듯 나만큼 커 버렸다.
큰엄마지만 기른정을 잊지 못하는지 여전히 나에게 응석을 부린다
세월이 껑충 뛰어넘어서 이제 속에 든 말 서로 털어 놓았을때 한 말이 안 잊혀 진다.
"형님, 형님이 계셨기에 제가 시집에 오는게 좋았어요...형님 보고 싶어서요"
그 큰눈에 잔뜩 웃음을 담고 응석을 부릴때면 난 한없이 고마움을 느껴야 했다.
그래도 어렵게 생각안하고 편하게 생각했다니....
맏며느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멀리 살지만 제삿날만은 꼭 챙겨서 전화를 한다
"형님, 죄송해요..혼자서 힘드실텐데...돈 쬐끔 보내드릴께요"
한사코 만류를 해도 넉넉치 않은 살림인데도 넘치는 비용을 보내왔다.
제사지낸 음식을 아이스 팩을 넣어서 택배로 보내 주었더니 울먹이면서 잘 먹겠다고 한다.
"형님, 모두들 동서 시집살이가 맵다고들 그러는데 전 달기만 한데요. 뭐....."
내 생일과 남편 생일까지도 기억했다가 소포로 보내온 정성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형님,..형님이 계셔 주셔서 고맙습니다......건강하세요..."
이쁘다..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