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안의 자식'...........
열달 동안 내 몸속에 넣고 애지중지 키우다가
삼신 할미가 점지 해 준 날에 이 세상 밖으로 내 놓았다.
서말의 피를 쏟고, 서말의 젖을 물려서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가면서
꺼질새라 날라갈새라 그렇게 스무해를 넘게 품에 안고 얼르고 쓰다듬으며 키웠다.
노심초사하며 가슴 졸인게 그 얼마였으며
기침만 하여도 가슴이 덜거럭 거리며 내려 앉은일이 부지기수였다.
밥투정하며 시위를 벌이면 따라 다니며 입속에 퍼 넣어 주어야 했고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요량으로 아이들의 비위를 마추며 '오냐 오냐'로 일관했었다.
비교적 엄하게 키운답시고 아이들의 뜻을 꺾은적도 있었고.
부모 뜻 안 따라 준다고 처음으로 머리를 쥐어 박은적도 있었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가슴 앓이를 해야 했다.
이젠 성년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가족안의 테두리를 벗어났다.
나름대로의 생활에 충실 할려고 에미맘 에비맘 헤아려 주는 햇수가 점점 야박해지는것 같았다.
어쩌다가 집에 들리면(?) 꼭두새벽에 눈 떨어지자마자 짐 챙겨서 가야 했고
방학이라고 특별히 시간내서 부모곁에서 응석 부릴 여유마저 바쁘다는 핑게로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엔 아직도 온기로 데워져 있을것 같은데
맘속에 부는 바람은 파랗게 날을 세우고 살갗을 베어내는 것 같았다.
그랬다.
이젠, 자식은 멀어져야 하는 관계고
부부는 한층 더 가까워 져야 하는 관계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인정할 수 밖엔 없는 현실이 그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아들 녀석을 마지막으로 내 보내야 할 즈음에,
에미 맘을 알았는지 넌즈시 떠 본다.
"엄마.......제가 나가는게 서운하면 집앞에 있는 대학 아무데나 갈까요?"
물론 내 대답을 다 꿰 뚫고 하는 소린줄 알고 있는데 능청을 떠는 거였다.
"누구 속을 뒤집을려고 그러냐?......한양가라......."
말은 낳아서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낳아서 서울로 보내라고 했지만
보내야 되는 당연성에 왜 이렇게 반기를 들고 싶은지 모르겠다.
가끔씩,가뭄에 콩 나듯이 집에 납시는(?) 날이면 '자식'이 아니고
'나그네'이고 '손님'이다
공연히 분주를 떨어야 했고 집이 한층 더 좁아 진것 같았다.
자식을 만들어 내는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다만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나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자식은 자기 자신을 창조 해 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식이 아닌 또다른 개체로 인정을 해야 했지만
등 떼밀어 내는 손이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 오무라드는 건 어쩔수 없었다.
얼마전에 부양의 의무를 팽게친 아들들에게 칠순을 넘긴 어머니가 소송을 했다.
월 200백만원을 지급하라는 법원의 판결에 입속이 웅담 씹은것 보다 더 썼다
그렇게 그렇게 키운 자식을 차거운 법정에 세워야 하는 어머니의 맘을
만분의 일이라도 헤아려 줄 자식이 과연 얼마나 될까.
돈 보다도 '情'에 인색한 기형의 가족 형태가 법을 앞세워 야박을 떨어야 했다.
그 옛날,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살림살이였지만,
草根木皮로 연명하면서도 가족에 대한 끈끈하고 따뜻한 사랑 만큼은 넘치도록 넉넉했다.
그러기에 순수성이나 인간의 기본 도리는 바닥에 깔고 살았다.
'孝'를 배웠고, '友愛'를 경험했으며 '仁義禮知"가 뭔지를 터득했다.
등 떼밀어 세상 밖으로 내 보낸 자식이
이제는 돌아와 내 앞에서 투정 부릴 날은 영영 사라진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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