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탈출이 그리 어려운게 아니었다.
8월도 허리 절반을 뚝 잘라먹은 늦은 휴가를 나흘간의 일정으로 떠났다.
남편은 'Road Map'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가지고 아이들을 불러 들였다.
빡빡한 일정 뒤로 다 미루고 한달음에 와 준 딸애가 고마웠고
동아리 모임을 하루 땡땡이 치고 합류해준 아들녀석도 기특했다.(입이 조금은 튀어 나왔음 ㅎㅎㅎ)
'춘천 막국수 축제'를 본뒤 강촌에서 텐트치고 일박을 하고 나니 온몸이 쑤셨다.
밖에서 자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만치 기온이 떨어져 있었건만
바깥잠을 고집한 남편의 고집을 꺾을수가 없었다.
이럴땐 독감이라도 콱 걸려서 집으로 되돌아 갈수만 있었으면 했다......홧김에 ㅎㅎㅎㅎ
얼치기 아침을 식은 밥으로 떼우고 아들녀석하고 합류할려고 미시령 고개를 넘었다.
산 머리를 휘둘아 날아다니는 안개의 유연한 몸짓이 장관을 이루었고,
차창 밖으로 손을 뻗치니 손끝에 잡히는 차가운 안개의 감촉은 물방울을 터뜨리는 그 감동 이었다.
안개가 집어삼킨 설악산의 자태는 보일듯 말듯한 여인네 속살같이
안개인가 싶었는데 설악이고..
설악인가 싶어서 헤집어 보면 안개였다.
"남편 잘 만나서 복두 많네...자네는....미시령 안개도 구경하고 ... ㅎㅎㅎㅎㅎ"
탄성을 지르는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남편이 변죽을 넣는다.
"하무요.......난 복두 지지리두 많아......"
까짓거 세금 붙나...먼 말을 못해 줄까봐........
뒷자석의 딸애는 자지러지게 웃는다.
엄마가 귀엽다나....ㅎㅎㅎㅎㅎ
속초에서 입이 반쯤은 튀어나온 아들 녀석을 보니 와락 반가운 맘에 덥석 안았더니...
덥다고 밀어낸다.......
하긴,
동아리에서 그 힘든 대청봉을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이제 좀 재미있게 놀려고 했는데
재미없는 부모하고 합류해서 끌려(?) 다닐 생각을 하니 우째 안 더울꼬.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제....
그렇다고 밀어내는 이 녀석을 어이할꼬..
내민손이 무안해서 머리를 한대 쥐어 박으니 하얀 덧니를 드러내며 싱긋 웃는다.....아마 미안했나부다.
주문진에서는 민박을 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밖에서 자자는 소리는 못하는것 같다....쌤통이다.
어긋장 놓느라고 밖에서 자자고 하니까 눈꼬리에 각을 세운다...ㅎㅎㅎㅎ
아침일찍 주문진 항구로 나가보니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갓 잡아올린 생선들의 퍼득임에서 삶의 강한 의욕들을 보는것 같았다.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곳으로 가보니 뱃 사람들이 왜 거칠어야 하는지를 한눈에 볼수 있었다.
어른 팔뚝 굵기만한 밧줄을 맨손으로 잡아 당기고 동여매고..
그리고 거친 파도와 맞서야만 살아남을수 있는 강한 자만이 바다를 지배할수 있었다.
앉아서 돈주고 사먹는 팔자가 얼마나 늘어진 팔자인가를 또 실감해야 했다.
좌판을 놓고 고등어를 파는 아줌마한테 첫 마수를 해 주고 돌아나오는데
남편이 또 한마디 거든다.
"자네는 복두 많아..남편 잘 만나서......고등어도 안팔고...ㅎㅎㅎ"
그려..부지기로 많수..그 복 감당할려니까 허리가 휘누만..
날씨가 하루의 여유를 빼앗아 가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편은 방앗간을 가자고 한다
참새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 방앗간을...
정선 카지노에서 첫번째의 그 짜릿한 감동에 이끌려서 두번째로 갔다가
거금(얼만지는 모름)을 날리더니 삼판으로 승부 건다며 차머리를 카지노에 박아 놓는다.
아들녀석도 구미가 당기는지 슬슬 뒤따라 가더니 이내 튕겨져 왔다.
나이가 미달이었다..만 20세가 안되면 지들 할애비라도 안된다나...한달 부족.....ㅎㅎㅎㅎ
밖에다가 보초세운 가족들에게 미안한지 한시간 반만에 나온 남편의 손에는 파란 지폐가 일곱장이
들려 있었다.
저녁은 거하게 살테니 이름 부르라고 한다..개선 장군처럼..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음 스무장을 채웠을낀데 ......아깝다...어쩌고 저쩌고...
과욕은 패가망신이거 모리고....ㅉㅉㅉㅉㅉ
레스토랑 구석진 자리에 네식구가 앉아서 휴가기간 동안의 일을 마무리 하고 있었다.
남편은 그동안에 자식들 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누에 실 뽑듯 풀어냈다.
휴가길의 낯선 곳에서 풀어 놓을려고 했던 얘기들을...
이젠 미성년의 그 엣된 솜털같은 자식이 아니기에 남편은 아마 자신감을 얻었나 부다.
'Road Map'이라는 명제에 걸맞게 남편은 심각하게 아이들의 눈과 귀를 틀어쥐고 있었다.
더러는 나무라기도 하고 격려도 하고,당부와 고마움의 표시도 했다.
부모 자식 간이지만 건넬말은 건네는것도 나쁘진 않았다.
'고맙다'...'미안하다'...'수고했다'....
하등의 움추릴 말이 아니건만 많은 사람들이 가족간에 무시하고 생략하고 의미를 두지않고
그렇게 살고 있기에 인사 치레에 인색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고마웠다.
점점 힘을 잃어가는 아비의 심정을 헤아렸는지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고스란히 부모 스케줄에
움직여준 그 맘이 기특했다.
그 나이면은 그 또래하고 어울리고 싶을건데........
비록 재미있는 휴가는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의미있는 시간들이었기에
나흘간의 그 시간 만큼은 소중하게 간직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