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대학 3학년에 다니는 딸애는 교장 선생님이다
학생수 60여명,
교직원수 30여명........숫자는 들락날락.....
무슨 얘기인고 하니 딸애가 활동하고 있는 야학의 구성원이다.
딸애는 임기 6개월의 짧은 교장직에 있지만 긍지와 포부가 남다르다.
별것 아닌것 같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 계층의 집단 교육기관(?)이라고 해야할지...
문맹의 연세드신분들,,,,가정형편상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들...
어려서부터 나보다는 남을 더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던 딸애의 성격상 별로 놀랄일은 아니지만
나이들면서 그 강도가 점점 더 높아가는 것이었다
작년에 일년 휴학 하면서도 이 야학의 일 만큼은 손에서 놓지를 않았고
그 중간 중간에 이화여대에서 실시하는 호스피스 교육도 받았다.
그것 뿐이 아니다
고등학교때부터 배운 수화 실력은 어느정도 프로에 가깝다.
교내 예술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모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그룹 수화경시 대회에서 금상을 받고는 거 하게 파티도 했다
그 계기가 아주 조그마한 것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때 음성 꽃동네를 데리고 간적이 있었다.
가기전에 아이들에게 당부를 했다
구경 가는것도 아니고 재미로 가는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느끼고 오라는 주문을 했다.
그곳에서 우리 가족들은 우리가 정상인 이라는것에 미안함을 느껴야 했고,
부족함 없이 누리고 사는것에 부끄러운것을 처음으로 느꼈던것 같다
딸아이는 돌아오는 차안에서 펑펑 눈물 쏟았던게 기억 난다.
소매로 눈물 훔치던 아들녀석은 이제부터는 부모님 말씀 잘 듣겠노라고 했다...도루묵이 되었지만..ㅎㅎ
그때부터 딸아이는 방학이면 고아원을 돌아다니며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혼자 가는게 아니고 동생도 데리고 가고 친구도 동행 시켰다.
집에 있는 헌옷이랑 가방 신발 그리고 고아들에게 소용되는 것은 눈에 띄는대로
가방 몇개를 빵빵하게 채워서 매고 가는거였다.
처음에는 저러다가 말겠지 했는데....그게 아니었다.
갈수록 딸 아이의 시야는 그런 쪽으로 뚫여 가는 것이었다.
대학 진학을 특수 교육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내가 말렸다.
너무 힘들것 같고 고생하는 자식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밤을 새우다시피 딸애하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봉사는 직업이 되면 안된다는게 내 주장이었고
딸애는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자기가 하겠노라고......
그 주장을 꺾는데는 여러날이 걸려서 결국은 우리 뜻대로 교육대를 갔지만
딸애의 사고는 결코 바뀌지 않았다.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는 여전히 양로원과 고아원을 드나들면서 집엔 아예 들어오질 않았다.
부모로서는 서운함이 왜 없었을까 마는 기특한 딸애의 행동에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딸애가 교장으로 취임하던 지난봄에 야학에 소형 냉장고를 들여 놓아 주었더니
그렇게 좋아할수가 없었다
빠듯한 예산에 지출할 길은 막막했는데...........
시에서 약간의 보조금이 나오지만 어림도 없는 금액이란다
아르바이트 하면서 버는 돈은 그대로 야학 경비에 알게 모르게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묵인하고 있어 주니까 딸애는 부모님께 죄송 하단 말만 되풀이한다.
몸치장이 뭔지도 모르고 산다......딸애는
그 흔한 악세사리 하나 없고 화장품은 스킨 로션 뿐이다
입학하면서 사준 화장품은 그대로 먼지를 덮어쓰고 한쪽 구석에서 썩고 있었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천연 기념물이라고 놀릴까.
딸애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부러울때가 더러더러있다
모두들 아름답게 치장하고 젊음을 만끽하고 사는데.....
딸애는 어두운곳이면 어디든 간다
비록 실속 없는 생활 같아 보이지만
굳이 밝은곳만 찾아 다니는 약삭빠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는것 만으로도
난 딸애의 기특함에 엄마로서의 자부심도 가져본다.
앞으로 교육자의 길을 걸을 딸애지만
남을 위하고 어두운곳을 찾아 갈려고 한다면 부모로서 기꺼이 동참해 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