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못이야. 아주 깊은 산 속에 꽁꽁 숨어있지.
내 얼굴은 초록색이야. 주위에 있는 초록나뭇잎들이 살랑거리며 내 얼굴을
초록빛으로 만들어놓았어. 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파랑색이 스미기도 한단다.
초록나뭇잎들이 파란 하늘, 흰 구름을 보고 반갑다 인사하느라 삐죽삐죽 하늘 위로 솟구치면
말이지.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살그머니 다가오면서 내 얼굴을 군데 군데
파랑빛으로 물들이지. 어쨌든 나는 아주 깊은 산 속에 홀로 사는 작은 연못이야.
그러던 어느 날,
“헉! 헉! 헉!”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니지. 처음까지는 아닐는지 몰라.
아주 오래 전에는 들어봤던 것도 같으니까. 하지만 진짜 오랜만에
바람소리, 새소리, 나뭇잎소리가 아닌 낯선 소리가 내 귓바퀴 사이로 쪼르르 들어왔어.
내 안에서 살랑 살랑 꼬리를 치고 있던 물고기 녀석들도 귀를 쫑긋 세웠지.
희끗희끗 흰 머리가 무성한 분이 내 얼굴 바로 옆에 바싹 다가앉으셨어.
그리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지.
“어허, 이 깊은 산 중에 이런 곳이 있다니! 정말 멋지구먼!”
그 분은 매우 기뻐하셨어. 나도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지. 너도 한 번 생각해 봐.
처음 만나는 누군가가 너를 보고 멋있다며 연신 감탄을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니? 최고겠지?
나는 이 낯선 분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마음 먹었어.
낯선 누군가가 다녀간 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처음에는 하루에 한 두 명씩, 낯선 누군가처럼 또 누군가들이 내 곁에 바싹 다가와
나와 내 주위를 휭 둘러보고 ‘멋있다! 멋있다!‘ 자꾸 감탄을 하고 팡팡팡 사진이라는 것도
찍고 사라졌는데 그 뒤로 나를 찾아오는 누군가들이 자꾸만 자꾸만 많아지는 거야.
정말 놀라운 일이지?
나는 신이 났어. 내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물고기들도 나빠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
우리는 그동안 너무 심심하고 외로웠거든.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많아졌으니 모두들
기뻐할 밖에. 그런데 말이지.
“탕!”
내 안으로 묵직한 것이 떨어졌어. 새로운 친구들은 그것을 병이라고 부르나 봐.
갑작스럽게 쿵, 떨어진 병 때문에 우리들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뻔 했어.
병은 너무 무겁고 아팠거든. 그런데, 그 뒤로 더 많은 것들이 내 안으로
쿵쿵쿵 탕탕탕 짝짝짝 떨어지기 시작했어.
언제 어떤 것이 떨어질 지 몰라 나와
내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물고기 친구들은 내내 불안에 떨며 지내야 했지.
“더는 못 참아! 못 참겠다고!”
빨간 물고기 친구가 말했어.
“맞아. 무겁고 냄새나고 아픈 그것들 때문에 더 이상은 살 수가 없어!”
파랑 물고기 친구도 말했지.
내 안에 있는 물고기 친구들이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은 본 적이 없어.
나는 두 눈만 멀뚱멀뚱 깜박거렸지.
“연못아, 네가 이야기 좀 해 봐.”
“그래. 새로운 친구들에게 그것들 좀 그만 떨어뜨리라고 네가 말 좀 해 봐.”
물고기 친구들이 앞을 다투어 말했어. 나는 잠깐 생각을 했지.
“그랬다가...... 새로운 친구들이 한 명도 오지 않으면? 그럼 어떻게 해?”
나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어. 진짜 자신이 없었거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물고기 친구들도 아무 말도 안했어.
특별히 해줄만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 시간은 정말 짧았어.
“그럼 뭐 어때? 우린 지금까지도 잘 살았잖아.”
“맞아. 새로운 친구들은 다 쫓아버리고 우리끼리 다시 살자.”
물고기 친구들이 다시 앞을 다투어 말했어. 나는 또 다시 생각을 했지.
“하지만......”
내가 입을 열자 물고기 친구들은 모두 나를 쳐다봤어.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용서하고 싶어. 나는 새로운 친구들이 있어서 정말 기쁘거든.
날마다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얼마나 행복한 지... 그깟 물건들 정도야 좀 떨어뜨리
고 던져 넣으면 어때. 난 새로운 친구들을 무조건 용서할거야. 무조건.”
나는 ‘무조건’이라는 단어와 ‘용서’라는 말에 강하게 힘을 주어 말했어.
물고기 친구들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어.
노랑물고기는 노랑 눈물방울을 툭 떨구어 내더니 고개를 휙 돌려버렸어.
빨강물고기는 꼬리를 파르르 파르르 떨더니 위쪽으로 휙 솟구쳐버렸고
파랑물고기는 작은 팔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바닥만 쳐다 보았지.
난 어떻게 했냐고? 글쎄......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어.
그냥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두 눈만 끔벅거렸지.
새로운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찾아와. 재재거리며 내 안에서 참방거리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힘차게 물장구를 쳐대며 즐거워 했지. 새로운 친구들의 힘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행복했어.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이제 물고기 친구들은 내 안에 없어.
내 안에는 새로운 친구들이 던져버린 병이랑 음식 찌꺼기랑 여러 가지 쓰레기들이
자꾸만 쌓여가고 있지.
솔직히 새로운 친구들을 용서하고 묵묵히 바라만 본다는 건 참 힘겨운 일이야.
역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거든. 내 얼굴도 영 말이 아닌 것 같아.
무엇보다 오랜 동안 나와 함께 울고 웃었던 물고기 친구들 그리고
초록빛깔 물풀들이 하나 둘 떠나가 버렸어.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건 또 다른 무언가를 잃어버려야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나에겐 나를 사랑해주는 새로운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들이 나를 사랑해주는 한 나는 그들을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주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슬퍼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나를 찾아오는 새로운 친구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차가운 바람이 자꾸만 내려앉는 탓일까?
초록빛 나뭇잎들이 하나 둘 내 얼굴을 때리고 있어서 그럴까?
아니야.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새로운 친구들이 나를 보고 이렇게 말을 하거든.
“아유, 냄새! 이렇게 시커먼 물이 뭐가 좋다고.”
이제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아.
환한 얼굴을 가진 해맑은 친구들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다 용서하며 지내려 했는데 그들이 나를 떠나버렸어.
언제나 나와 함께 하던 물고기 친구들처럼....
용서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봐. 잘못한 것까지 굳이 용서할 필요가 없나 봐.
친구가 잘못을 할 때는 따끔하게 말을 했어야 했나 봐. 모든 걸 다 받아줄 필요가 없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