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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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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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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불이에요


BY dasu618 2004-05-19

사각사각.. 아! 또 뭐가 들어왔네.
벌써 며칠 째, 조그마한 벌레들이 내 몸 속으로 자꾸만 기어 들어오고 있어.
나는 진짜로 싫은데 말이야. 앗, 따거! 어어? 조그만 요 녀석들이 이제 깨물기까지
하네. 그래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어. 나는 깜깜한 장롱 속에 몇 달 째,
꽁꽁 갇혀있는 아주 조그마한 이불이거든.

“날 꺼내 주세요. 뭔가가 자꾸만 내 몸 속으로 들어와요. 구해줘요. 아파요!”

아무리 소리를 질러보아도 내 목소리는 장롱 밖으로 나가지 않나 봐.
아무도 날 구해주지 않아. 장롱 문은 언제나 꽁꽁 닫혀있어.

아주 잠깐씩 장롱 문이 살짝 열려서 부리나케 소리를 질러봐도 나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아. 아, 나래가 누구냐구? 나의 주인이야.
아주 오래 전부터 늘 나와 함께 했던 나만의 주인.
하지만 나래의 얼굴을 본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어.

왜냐하면  으~~~ 바로 그 녀석 때문이야.
그 녀석이 나래의 방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나서부터 나래는 날
본 척도 하지 않아. 침침한 장롱 속에서 벌써 몇 달째. 햇님도 한 번
만나지 못했다구. 손이라도 있으면 굳게 닫혀있는 장롱 문을 쾅쾅
두드렸을텐데...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어..

우당탕탕! 와~~~ 나래가 유치원에서 돌아왔나 봐.

“나래야! 날 꺼내줘! 넌 나를 좋아했잖아!”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어.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와~~~ 풀썩풀썩... 들썩들썩.... 또 그 녀석이야. 나래는 또 그 녀석이랑 놀고 있어.
너무나 폭신폭신해서 흔들흔들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게 한다는데
나래는 그 녀석이 뭐가 좋을까.. 우하하하... 나래의 웃음소리가 들려..
나래는 이제 정말 나를 잊었나 봐..

나래의 방 한 가운데를 차지한 저 폭신거리는 녀석이 들어오기 전까지
나래는 나를 참 좋아했었어. 언제나 내 몸 위에서 폴싹폴싹 신나게 뛰고 뒹굴었으니까..
나는 정말이지, 내 몸이 온통 멍투성이가 되어가는 것도 몰랐어..
나래가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그런데

저 녀석이 들어온 다음부터 나래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난 나래가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도 기억하고 있어..
그 때 난 아주 뽀얗고 뽀송뽀송했었는데.. 아마도 나는 그 때가 제일 예뻤을걸!
우리 나래가 아주 예뻤던 것처럼.. 그 때 나래는 나와 항상 함께 있었어.
정말이야. 하루 스물 네 시간 중에 스무 시간은 아마 나랑 있었을 걸..
그 때가 좋았는데.. 내 몸에 쉬를 하고 가끔씩 뿡뿡대며 방귀를 뀌어대도
그 때가 정말 좋았어.. 다아 지나간 이야기지만 말이야..

시간이 흐르면서 나래의 몸이 자꾸만 커졌어.. 아니, 내 몸이 작아진 건가?
아무튼 나래의 몸이 내 몸에 꽉 차게 들어맞게 되니까... 나래의 엄마는
나래의 방에 폭신거리는 괴물을 갖다 놓으신 거야.
그 뒤로 나래가 나를 찾는 일은 아예 없어졌지...

이제 나래는 나를 찾지 않을 테고.. 스물거리는 요 녀석들은 내 몸안에서 자꾸만
늘어갈 거야.. 나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어... 훌쩍..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하네..
그런데 그 때, 덜커덕... 우와.. 굳게 닫혀있던 장롱 문이 열렸어..

“어머나, 그새 벌레가 생겼네!”

나래의 엄마야.. 그럼 그렇지..

“그 동안 왜 그렇게 절 모른 척 하셨어요? 이제 절 꺼내주실거죠?”

나래의 엄마는 부드럽게 나를 안으셨어. 와.. 이게 얼마만인지..
드르륵..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나래의 엄마는 나를 따뜻한 햇볕 아래 쫙 펼쳐
놓으셨어... 후다다닥.. 내 몸을 뒤덮고 있던 조그만 녀석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고
있어.. 와, 이제 살 것 같네.. 나래의 엄마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드려야겠는 걸..
까암박.. 졸음이 쏟아져.. 아마도 따뜻한 햇살 때문일거야.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햇님... 얼마나 좋은 지 아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래엄마의 손길이 느껴져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어.
나래의 엄마는 팍팍.. 절도있게 내 몸을 포갠 후 다시 장롱 속에 넣으려고 해.
난 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잠깐.. 요걸 다시 넣어둘 게 아니라...“
“맞아요. 저를 그냥 넣어두지 마세요...”

나래의 엄마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셨어.. 뭐라고 한참을 이야기하셨는데
내 귀엔 하나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다시 장롱 속에 갇힐까봐 너무 두려웠거든..

잠시 후 나래엄마가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내게로 다가왔어..
그리고 내 몸을 다시 팍팍.. 포개어 보자기 안에 넣으셨지...
어디로 가는 걸까.. 일단 장롱은 아닌 것 같아..
나래 엄마가 나를 보자기에 꽁꽁 싸서 어디론가 가는 것 같아..

어딜까? 내가 있을 곳.. 장롱이 아닌 곳.. 그곳이 어딜까?

털컥털컥 뽀르르르 털컥털컥 뽀르르르...
무슨 소리냐구? 글세.. 저기 문 앞에 솜틀집이라고 써있는 걸..
아, 그러고 보니 내 몸이 이상한 기계 안에서 털컥털컥 뽀르르르.. 그러고 있네..

“다 됐어요” 낯선 할머니의 목소리..
“고맙습니다” 와. 나래엄마의 목소리다.

나래 엄마는 나를 다시 커다란 보자기에 팍팍 싸넣으셔. 그런데 말이야..
내 몸이 무척이나 가벼워진 것 같아.. 뽀송뽀송해진 것 같기도 하구..
털컥털컥 안마를 받아서 그런가? 뽀르르르 사우나를 해서 그런가?
나래 엄마는 나를 꼭 끌어안고 또 어디로 가고 계셔.. 어딜까?
그래도 기분은 참 좋아. 내 몸이 훌쩍 가벼워졌으니까..
스물거리는 벌레들이 단 한 마리도 없으니까...

나래 엄마가 어디엔가 도착하셨나봐. 걸음을 멈추시더니 딩동! 벨소리가 들리고
어떤 아주머니가 나래의 엄마를 반갑게 맞이하셔..
아무래도 나래 엄마의 친구쯤 되나 봐..

나래 엄마는 보자기에 담긴 나를 사뿐히 내려놓으시더니 답답했던 보자기 끈을
확 풀어주셨어. 와~ 환한 빛이 내리쬐는 따뜻한 곳이야.. 여기가 어딜까?

“어머. 너무 예뻐요!” 처음 듣는 아주머니의 목소리.

그런데 와~ 아주머니의 배가 아주 아주 불룩해.
내가 처음 나래의 집에 갔을 때, 그러니까 나래를 만나기도 전,
바로 그 때 나래 엄마의 배도 저랬었는데...

“고마워요. 잘 쓸께요”

처음보는 아주머니가 나래의 엄마에게 인사를 해.

“잘 키워요”

나래의 엄마는 이 말 한 마디를 남긴 채 일어서 버렸어. 나는 그냥 두고 말이야....
그런데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여기에서 곧 새로운 주인을
만날테니까.. 그 정도는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어..

새로운 주인은 내가 처음 만났던 그 조그마한 나래처럼 아주 작고 귀여울 거야.
새 주인은 나래가 그랬던 것처럼 또 하루 스물 네 시간 중 스무 시간씩은
나와 함께 있을거야.. 가끔씩 뜨뜻하게 쉬도 해주고 뿡뿡 방귀도
뀌어가면서 말이야.

야, 생각만 해도 즐겁고 신이 나는 걸.. 나래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래에겐 폭신거리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으니까
나 하나쯤은 없어져도 괜찮을 거야.. 히히..

 

나래야, 안녕~

새로운 친구야.. 이제 너를 얼른 만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