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그럭 털그럭..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르겠다. 옆에 있는 못생긴 녀석이 내 옆구리를
자꾸만 찌르고 있는 게 말이다. 허긴 요 녀석도 몸이 어지간히 근질거릴 게다.
요 녀석은 나보다 한 달은 더 먼저 이곳에 박혀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좀
참아야하는 지도 모른다. 나는 며칠 안 있어 이 곳을 빠져나갈 테니까.
나는 수현이가 가장 좋아하는 뱅글뱅글 팽이니까..
딩동 딩동.. 벨소리가 들린다. "아빠다!" 수현이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낭랑하다.
누구든 집에 사람이 찾아들 때면 수현이의 목소리는 하늘을 난다. 그만큼 사람을
좋아하는 정이 많은 녀석이 나의 주인, 수현이다. 게다가 지금 문 앞에는 수현이가
너무나 좋아하는 아빠가 서있는 게 아닌가. 수현이의 목소리가 훨훨 구름을 쫓아
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이야호~ 이야호~~" 오늘따라 유난히 더 방방거린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다.
나는 너무 궁금해서 있는 대로 목을 빼본다. 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봐도 내 목은
빠지질 않는다. 그냥 들려오는 소리에만 귀를 쫑긋 세운다.
"와!! 맞아요!! 고맙습니다!!" 불길한 소리다. 수현이에게 다른 친구가 생기는 것
같다. 안되는데.. 수현이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긴다면 생각보다 더 오래 이곳에
있어야 할 거다. 전에도 그랬었다. 내 옆에 있는 이 못 생긴 녀석도 나보다 더 늦게
수현이의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며칠 못가서 수현이는 이 녀석을 팽개치고 다시
나를 찾았다. 그만큼 나는 수현이의 사랑을 오랫동안 꾸준히 차지하고 있는 아주
귀한 몸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수현이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기는 하다.
나는 원래 강원도 홍천에 있는 야트막한 산자락에서 하늘 높은 줄만 알고 자라던
참나무였다. 그 때 나는 눈이 오건 비가 오건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선 채 차갑게
내 몸을 때리는 눈과 비를 그냥 뒤집어 써야만 했다. 물론 그 때가 마냥 싫지는
않았다. 몸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끊임없이 요동을 치며 돌아다녔고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한 뼘씩 내 몸이 하늘을 향해 자라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 때 나를 못 견디게 했던 건 내 머리 위를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새들이었다.
특히 그 녀석들이 정신없이 쏟아내는 응가는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의 기쁨이 사라져갔다. 한 뼘씩 자라던 내 몸에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한 번 생겨난 갈증은 하루가 다르게 더해갔다.
숨이 막힐 만큼 목이 타던 그 때 수현이의 할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다.
"요 정도면 좋겠다!" 할아버지는 내 몸을 한 번 쓰다듬고는 드르륵~ 요란한 소리가
나는 전기톱을 내 몸에 갖다 대었다. 내 몸이 강둥 잘려지는 걸 느끼며 나는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원망했었다. 너무 슬퍼서 꺼이 꺼이 소리내어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슬픔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반으로 접은 손바닥만한
크기로 잘라내고 검고 까칠한 물건으로 내 몸을 쓱쓱 닦아내셨다. 다시 요란한
소리로 드르르륵~~~ 몇 차례 같은 행동을 반복하시더니 참나무였던 나를 뱅글뱅글
팽이로 만들어내셨다. 바로 그 때 나는 천사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가진 수현이를
만났다.
"할아버지!! 그게 뭐에요?"
"응. 팽이야. 한 번 볼래?"
할아버지는 내 몸을 가느다란 헝겊으로 찰싹찰싹 때리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나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읍~~ 숨을 멈추고 있는 사이 내 몸은 자꾸만
뱅글뱅글 돌았다. 내 몸이 뱅글뱅글 돌 때마다 천사같은 수현이의 작은 입은 더
크게 벌어졌다. 작은 가슴 속에 나를 옴팡지게 끌어넣으며 한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을 거다. 내가 수현이에게 내 마음을 모두 줘버린 게...
환하게 웃는 얼굴이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나는 내 몸이 아프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니 수현이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해서 수현이의 환한 웃음을 보기 위해 자꾸만 자꾸만 뱅글뱅글 돌고 싶었다.
그렇게 수현이는 나의 소중한 친구이자 영원한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를 팽이로
만들어주신 할아버지는 지난 해부터 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할아버지와 함께
내 몸을 만져주셨던 할머니를 지난 해부터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착 핑 차르르 팽그르르르.... 낯선 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귀를 쫑긋 세운다.
"와~~ 아빠, 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엄마.. 이거.."
"와, 멋진 걸!!"
"그쵸? 최고죠??"
뭔지는 모르지만 수현이는 새로 온 친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아빠도 엄마도 수현이의 새 친구를 반겨주신다. 갑자기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나마 할머니는 수현이의 새 친구를 드닥 반기는 것 같지 않아 다행이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은 이 곳에서 잠을 자야할 것 같다. 발 아래 손 때 묻어
맨들맨들해진 나무블럭들이 걸리적댄다. 옆에 있는 못 생긴 녀석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주면 좋을텐데.. 자꾸만 옆구리를 찔러대서
제대로 잠을 못 잘 것 같다.
수현이의 얼굴을 본 지 너무 오래 됐다. 새 친구가 오고 나서 수현이는 나를 아예
잊었나 보다. 며칠이 지나고 또 며칠이 지났는데 수현이는 나를 거들떠볼 생각도
안한다. 추위도 지나갔는 지 요즘은 눈만 뜨면 밖으로 나가는 눈치다. 아마도 며칠
전의 며칠 전에 아빠가 건네준 새 친구를 끼고 나갔을 거다. 그 녀석은 아직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그 녀석이 궁금해진다. 어떤 녀석이길래
이렇게 오래도록 수현이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걸까.. 셈이 나려 한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분해서 눈물이 나려고도 한다.
"아줌마! 수현이요!!"
수현이랑 늘 붙어다니는 석이의 목소리가 요란하다. 모처럼 창문을 활짝 열고
이불을 널려던 수현이의 엄마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신다. 무슨 일일까.
궁금하지만 알 도리가 없다.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니 말이다.
"아유, 이걸 어째~~"
"으앙~~~~~"
수현이의 울음소리다,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이리 저리 눈동자를 굴려 수현이를 찾았다. 피다.
수현이의 얼굴에 피가 흘러내린다. 엄마는 수현이를 등에 업은 채 서둘러 빨간
지갑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신다. 철컥! 열쇠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잠겼다.
수현이의 울음소리가 멀어져간다. 창 너머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과는 달리
내 마음은 깔깔하기만 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모처럼 햇볕을 만나려 한껏
들떠있던 이불이 엉거주춤 베란다 끝에 걸려있다. 내 마음도 꼭 저 모양이다.
엉거주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짐짓 굳어버리는 것만 같다.
어느 새 거실에 어둠이 깔렸다. 아침녘에 창문을 열어둔 탓에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운 기운도 덮혀있다. 철크럭!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수현이가 돌아오는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방안을 훈훈하게 만들어주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수현이를 안고 아빠가 들어오신다. 할머니를 부축하며 엄마도 들어
오신다. 하루종일 네 식구가 같이 있었던 모양이다. 수현이는 곤히 잠이 들어있다.
눈 위쪽에 하얀 반창고가 붙어있다. 수현이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에서 봤으면
좋겠는데 수현이의 아빠는 매정하게 수현이를 끌어안고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잠이 들었으니까.. 치료를 받고 온 것 같으니까 괜찮겠지.. 마음을 다독이려 애써
본다. 하지만 좀처럼 먼지같은 마음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환하게 웃는 천사같은
수현이의 얼굴을 꼭 한 번만 봤으면 좋겠다.
"큰일날 뻔 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그러게요. 그 놈의 팽이가 뭔지..."
팽이??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 무슨 소린 지 알 수가 없다.
"그거 어디 있어?"
수현이를 뉘여놓으셨는 지 아빠가 방에서 나오시며 묻는다.
"버렸어요. 하마터면 애 눈을 잃을 뻔 했는데 그걸 뭐하러 갖고 있어요?"
"그러게. 무슨 애들 장난감을 그렇게 만드냐.. 쯧쯧"
할머니가 혀를 차신다. 새로 왔던 친구가 수현이를 다치게 했나보다. 팽 차르르르...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 녀석은 자동으로 돌아가는 팽이였던 것 같다.
힐끔! 아빠가 이쪽을 쳐다보신다. 움찔! 내 옆에 있던 못 생긴 녀석은 물론 발 아래
나무블럭들까지도 모두 놀라 몸을 웅크린다.
"저것들도 싹 갖다 버려. 이제 위험한 건 집안에 두지 말라구!"
"그래두 얘. 수현이가 깨면 찾을텐데..."
"위험하다니까요. 큰일날 뻔 했는데 설마 또 찾겠어요? 에이!!"
아빠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신다. 휘리릭....
사방은 깜깜하기만 하다. 한낮에 불어오던 부드러운 바람은 어디로 갔는 지 싸한 기운만 감돈다. 바닥에서 한기와 함께 케케한 냄새도 올라온다. 검은 구름 사이로
작은 별들이 아주 가끔씩 고개를 내민다. 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쫓겨났다.
수현이랑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난 수현이를 다치게 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쫓겨나버렸다. 수현이를 다치게 한 녀석은 어디에 버려졌을까. 수현이가 그렇게
반기며 좋아하던 녀석인데 그 녀석은 왜 천사같은 수현이를 다치게 했을까..
생각할수록 속이 상한다. 홍천 그 야산의 내음이 갑자기 떠오른다. 쓱싹쓱싹
내 몸을 어루만지며 수현이에게 이르게 했던 할아버지의 손길도 떠오른다.
이제 난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로 가야 할까..
한낮에 들었던 수현이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 수현이의 웃음소리를
꼭 한 번만 더 들었으면 좋겠다. 눈물이 가슴 속으로 주루룩 흘러내리려 한다.
"여기 어디 있을텐데..."
할머니다. 찰카닥 찰카닥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벗겨진다.
"아이구, 요기 있었네."
할머니의 손길이 나를 감싼다. 훅~~ 할머니의 입김이 내 몸의 한기를 걷어낸다.
할머니는 먼지 묻은 내 몸을 어루만지시고는 소매춤에 나를 들이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 찾았어?"
"그래! 예 있다!"
할머니가 나를 끌어내신다. 환한 형광등 불빛이 내 눈을 시리게 한다.
"고맙습니다. 이제 조심 조심 놀께요!"
"그래. 그건 할애비가 만들어준 거니까.."
수현이가 나를 꼭 끌어안고 보들보들한 뺨에 부벼댄다. 이 내음. 이 감촉.
꿈만 같다. 수현이를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수현이의 눈 바로 위쪽에 아직도
하얀 반창고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도 수현이의 천사같은 미소, 방울같은 웃음
소리는 여전하다. 수현이의 따뜻한 손길이 다시 내 몸을 만져주고 있다. 난 이제
수현이의 손바닥 안에서 잠을 잘 수 있다. 조심조심 돌아야지. 수현이를 절대로
아프게 하지 말아야지. 다시 내가 사랑하는 주인, 수현이의 곁으로 돌아와서
나는 정말 행복한 팽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