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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며느리에게


BY 수련 2007-04-12

 

너희들이 결혼한지 벌써 일년이 되었구나.

정말 세월이 빠르네. 하긴 민서가 태어나서 백일이 가까워오니

어찌 시간이 덧없이 흐른다고 하겠니.

 

새애기에게 보낼 함을 싸면서 행복해 했던 기억들이 난다.

하나 밖에 없는 며느리에게  어떤 선물을 함에 넣으면 좋을까 고심하면서

이것 저것 준비할 때 설레던 마음에

이 세상에서 나만 시어머니가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었어.

 

코엑스의 그 넓은 결혼식장에서  많은 축하객들앞에 서있던 너희들은 눈이 부시도록

너무 아름다운 선남선녀였단다.

아버지와 내앞으로 와서 절을 할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아버지는 감동스러워서

울컥하시더라고 하데. 나는 그저 좋아서 입이 함박이었고.

그랬던 아버지에게 이런 불행한 일이 닥칠 줄 누가 알았겠니.

가끔씩 너희들 결혼 사진을 보면서 현재의 이 상황을 잠시 잊어버리고 그때의 행복한

순간을 회상하면서 시계를 거꾸로 돌릴수 있다면 다시 그 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네.

 

지난 일년동안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구나.

상민이에게 '민서애비'라고 부르고,새애기에게 '민서에미'라고

호칭도 바뀌고. 남들에게는 언제?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었던것 같아.

 

물론 좋은 일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겟니.

아버지기 편찮으시는 바람에 배가불러오는 민서에미에게 살갑게 대해주지도 못하고,

여러가지로 미안한 마음이란다.

 

 병원에 있을 때 잔뜩 부른 배를 안고 솜씨를 부려 여러가지 맛난 반찬을 정성껏 준비해 온

우리 며느리가 어찌나 이쁘던지..  아는이 없는 낯선 서울  병원에 아버지가 계실 때

듬직한 내 아들,민서애비가 가까이 있어서 든든했단다.

 

너희둘이 병원을 정하고 우리집안의 천사 민서를 무사히 순산해서 너무 대견하더구나.

환갑 지난 아들도 부모에게는 아직 품안의 어린 자식처럼 여겨진다는데

어느새 성인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루어 가장역할을 잘해내는  민서애비를 보니

참으로 뿌듯해 지더구나.

 

아버지가 편찮으시면서 너희들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내 나름대로

신경을 쓰긴 했지만 그래도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을거야.

아직은 내가 건강하니 걱정하지말아라.

 

민서를 잘 키우고 너희들이 건강하고, 다투지않고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이는것이

나에게는 위안이 된단다. 멀리 있어 우리 예쁜 민서를 자주 보지를 못해 안타깝지만, 우리 며느리 특유의 높은 톤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전화를 통해 자주 보내주는 동영상을 보니 민서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서 그나마 활력소가 되어 힘이 나는구나.

 

 민서 사진을 식탁유리밑에 빙 둘러 넣어놓고 밥먹을 때 쳐다보고,

화장실에도, 방에도, 마루에도, 온 집안에 우리 민서사진이 꽂혀있어 마치 곁에 있는것 같아.ㅎㅎㅎ

 

아버지는 아직 말씀을 의지대로 하시지는 못해. 때때로 한 단어씩 쓰곤 하지만 또 금방 잊어버리시는구나. 정말 진전이 안되는병이야.

굼벵이보다 느리다고했더니 고모할머니가 바늘구멍만큼이나

작게 회복이 되는 병이라고 하시는데 그 말이 더 맞는것 같아.

어쩌면 굼벵이가 더 빠를지도 모르겠어.

 

의외로 회복기간이 오래 걸리는구나.

연방 말문이 터질것처럼 보이곤 할때는 오늘, 내일쯤 말씀을 하실라나하고

가슴을 졸이며 아버지 입만 쳐다봤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고 오해였던것같아.

죽은 뇌세포자리에 새로운 세포가 자리잡을 때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리나봐.

너희들 말대로 내가 종더 냉정하게 대처하고 마음을 먹고

느긋하게 시간의 흐름을 느끼면서 인내했으면 이렇게 애간장이 타지는 않았겠지.

괜히 조급한 마음은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오늘은 말씀을 하실라나' 하는 기대속에서 매번 실망을 하곤했지.

그때마다 밀려오는 허탈감은 어찌 말로,글로 표현할 수가 있겠니.

 

지금은 그나마 마음을 많이 비우면서 하루하루를 지내지만 ,며칠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도깨비처럼 찿아오는

슬럼프에 빠지면 아버지도 나도 허우적거리면서 힘든하루를 보내기도 한단다.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터트리는 아버지의 오열은 감당키가 힘들어.

아버지의 등을 쓸어내리며 달래는 나도  힘들어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너무 아파 침을 삼키기도 힘들때도 있단다.

그럴때는 엄마 혼자 어찌할바를 몰라 아재들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어울려

저녁도 먹고 노래방도 가면서 넘기곤해. 그러나 그런것은 일시적이고 아버지가

말을 하실때까지 엄마에게 주어진 오려운 숙제이기에 그때마다 잘 감당해내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대처해 나가야겠지.

 

지난 번에 혜은이가 내려와서 엄마도 시간을 만들어 글도 쓰고 책도 읽으라지만

도무지 쨤을 낼수가 없네. 잠시도 아버지곁에 없으면 불안해 하시니

혼나서 밖에 나갈수도 없고, 또 집안에서도 편안하게 컴퓨터앞에 앉아 글을 쓸수도 없더구나.

내가 곁에 없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안하시려고 하시면서

마냥 우두커니 혼자 앉아계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 명치끝이 너무 아파서

이내 컴퓨터를 꺼버린단다.

아버지가 말씀을 하시는 그 날까지 나는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되려 마음이 편하네.

 

나는 그래도 성하지만 아버지 당신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드시겠니.

상대방의 말이 다 들리지않고 하고자 하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으니

기가 막히겠지.

 "어째서 이렇지.." 라는 말을 되뇌이는

아버지에게 뇌경색으로 언어중추신경세포가 죽어서 그렇다고

어줍찮은 설명을 해보지만 가슴이 아파서 더는 말을 잇지를 못한단다.

  "시간이 지나면 차츰 좋아질거예요"만 되풀이 하는데

허공에서 맴도는 말처럼 내 귀에도 허황하게 들리더구나.

 

 힘들고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때가 참으로 많아.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을란다.

처음처럼, 한결같은 마음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내가 할수 있는 여러가지 프로그램과 모든 힘을 발휘해서

아버지가 말문을 여실때까지 노력할거야.

2007년! 올 한해를 잘 넘기면 이 해가 지나가기 전에 말씀을 하시지않을까 싶다.

 

민서백일에는 "민서야!"하고 부를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과 염원이었는데

아마 불가능할 것같아.

내년 민서 돌 때는 할아버지가 "민서야~" 하고 손녀 이름을 부를수 있겠지.

그렇게 느긋하게 길게 시간을 잡을란다.

 

월요일부터 단월드(기 수련)에 다녀. 여러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하시고 또 집중을 하시면

뇌세포가 활발하게 움직여 도움이 될까 했는데 의외로 아버지가 잘 따라하시네.

덕분에 나도 같이 명상도 하고 운동을 하니 건강헤도 좋을것같아.

 

그동안 쭉 지켜보니 다른건 다 기억을 하시는데  언어에 관한 기억과, 기계,공구를 다루는 모든 기억이 사라졌더라고.. 집안의 모든 전자기구 조작하는 법은 이제는 다 터득하셔서 잘하시는데

운전은 불안해서 가르켜드리지 못하겠더구나.  그런데 신호등체계와

길을 다 아시는것 같아서 혹시나 하고 운전을 시도해봤더니  본능적으로  하시더구나.

 

시동을 걸때 머뭇거려서 불안했는데

무의식적으로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리고 기어를 조작하시면서 안전밸트를 매시더구나.

어제는 한 시간 거리인 시외로 침맞으러 다녀오기도 했어.

운전대를 잡으면 긴장도 되고 여러가지 판단을 해야하니까 바짝 정신을 차리고 하면

뇌세포의 활성화에도 좋을 것 같아.

 운전을 조심스레 하시는 아버지옆에 앉아 있으니 처음에는 온몸에 진땀이 흘렀지만

하루다르게 능숙하게 운전을 하시니 이제는 나도 마음이 편해진단다.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지는 못해. 아직 오른손에 힘이 없어서 기어조작할때는

힘이 들어하셔.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기억을 되살리면 언어기억도 되살아날거라고 믿는단다.

 

민서 태어난 기념으로 양앵두나무를 심었어. 양앵두는

열매가 크고 달다고 하네. 우리 민서하고 같이 잘 자라서

예쁜 꽃을 피우고 빠알간 열매를 맺어 민서가 톡~ 한알

따서 조그마한 입으로 가져가는 상상을 하면서 웃는단다.ㅎㅎㅎ

아마 3년은 되어야 열매가 달린다니 그 시기쯤이면 민서가 뛰어다니겠지.

 

우리 민서 백일 기념으로 얼굴을 그리려고 했는데 집중이 잘 안되어서

백일때까지 그릴런지 모르겠다.

민서 백일때 아무래도 사돈식구들과 같이 식사를 못할것 같아.

아버지가 말씀을 다 알아들으시지못하고 아직 젓가락질이 능숙하지않아

불편할거야. 아버지 자존심에 사돈식구들과  자리를 같이 안하시려할거야.

 

그러니 그냥 우리 식구끼리 따로 밥을 먹자꾸나.

민서 외활아버지께 말씀을 잘 드려라.

 

참 인사가 늦었네. 너희들 결혼 일주년을 축하한다.

혜은이더러 대신 너희집에 가라고 했어. 그 편에 조그만 선물을 보낼게.

 

서로 다투지말고 잘 살아라. 화가 날때는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서로의 가슴이 상처가 되는 언행도 삼가고,  왜 화가 났는지 헤아려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아마 다툴일이 없을 거야.

 

내일은 부활절이구나. 민서 데리고 성당에 가야지? 유아실에 들어가면 될거야.

나간김에 민서 데리고 공원에도 가고.

예수님 부활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너희들 결혼 일 주년도 축하한다.

정말 좋은 , 부활절과 겹친 날이구나. 너희들은 앞으로 아주 잘 살거야. 내 예감이..ㅎㅎㅎ

 

이 메일을 사흘에 걸쳐 완성하네.ㅎㅎㅎ

잠간잠간 컴을 열어서 쓰다보니 그래.

아버지와 산에 갈란다. 벚꽃이 지기 시작하는데

눈꽃처럼 날리는 풍경이 환상적이야.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고 ,우리 다같이 예수님 부활을 기뻐하자꾸나.

동시에 아버지의 쾌유도 빌고.... 잘 지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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