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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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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도둑의 아내)


BY 수련 2005-07-14

하느님,부처님,공자님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어요.

 

지난 일요일에 습기가득한 집안에만 있기가 궁상스러워
하릴없이 비속으로 차를 몰고 나갔거든요.
우리 동네를 조금 벗어나면 바다를 끼고 있는 일주도로에 해당 면사무소에서
길가에 수국을 심어놓았는데 얼마나 운치가 있는지 바다와 어우러져 아주 절경이랍니다..

비는 추적추적 오는데 음울한 기분이 다양한 보라 빛을 띄우며
생글거리는 수국을 보니 덩달아 나도 입가에 미소가 생기더군요.
그 유혹에 차를 천천히 몰면서 수국과 눈을 맞추며
'예쁘다'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눈을 수국에서 떼지를 못하니
옆자리에 타고있던 울 집 남자가  '차 세워' 터벅터벅 걸어가서는
뒤쪽에 있는 조그만 수국 한 그루를 순식간에 쑥 빼오는 거예요.
어머머머. 마누라가 예쁘다 한다고  그렇게 쑥 빼오면 어떻게 해요?
울 마누라가 좋다카는데 어느 놈이 뭐라 할꺼여.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대요. 일요일이라  점심때 바닷가횟집에서
회를 먹으면서 소주를 한 잔했더니 술기운에 그런 용감성(?)이 도졌나봐요.


아니 아니, 남이 빼면 못하게 해야 할 당신이 우째 그런 짓을...
얼떨결에 트렁크에 싣긴 했는데 영 찝찝하더군요.
도둑질을 하고 나니 울 집 남자도 맘이 안 편한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퍼뜩 가자고 하더라구요.

아 그런데, 저기 길가에 일 톤 트럭이 비상깜박이를 켜고 세워놓은
차 옆으로 남자 둘이서 어정쩡하게 서서 우리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더군요.
도둑놈은 도둑을 알아본다고 대번에 수국 도둑놈인줄 알겠대요.
차를 세워놓고 울 집 남자더러 가보라고 했죠. 마지못해 내린 울 집 남자는
뭐 합니까?
별거 아닙니다. 그냥.. ..
트럭의 짐칸에는 흙만 묻어있고 아무것도 없더래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 넘버를 보는 척 하고 차를 출발시키면서
백미러로 보니 두 남자가 서둘러 짐칸의 뚜껑을 열더니 수
국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마 이중으로 짐칸이 설치되어 있었나봐요.
우리가  차번호를 확인하니까 신고할까봐 그러는지
겁을 집어먹고 도로 심으려고 여러 그루의 수국을 끄집어내더군요.
 
다른 길로 돌아  나오는데 수국이 심겨져있는 도로변에
아까 본 트럭과는  다른 일 톤 트럭이 또 길가에 비상깜박이를
켜놓고 세워있는 폼이 또 수국을 빼가려고 눈치를 보는 것이 틀림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차를 세우려니 울 집 남자  그만 가자고 하더군요.
우리도  한 그루 훔친 도둑인데 죄책감에 남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싶겠죠.
진짜로 도둑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양심의 가책을 받아 도로 갖다 심으려니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핑계삼아 그냥 집으로 와버렸어요.
 
집에 와서 차 트렁크 쪽을 보니 흙이 덕지덕지 묻어있어 아파트 주민이
이상하게 여길까봐 얼른 휴지로 털어 내고, 수국은 트렁크에 가두어 둔 채
집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저녁 밥맛도 없고 텔레비전 연속극도 재미가 없고....
에라 모르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려는데
차 트렁크 속에 갇힌 수국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겠더군요.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아파트 주차장이 깜깜하게 조용하더군요.
살금살금 내려가서  분리수거 통에서 헌 화분을 하나 주어
흙을 조금 더 채워 수국을 심어 집으로 가지고 와서는 물을 흠뻑 주었답니다.
아침이 되어 베란다로 나가보니  보랏빛 향기를 뿜는 수국에게 눈을 맞추지를
못하겠더군요.


소담스레 송이 송이를 피우고 있는 수국을 바라보는 마음이 왠지 떨떠름하고

자꾸만 부담스러워집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유난스레 저는 꽃을  좋아해서
이사간  집을 방문 할 때는 세제나 휴지보다 항상  꽃 화분을 들고 가는데
집안이 환하다고 좋아해서 지금도 그 습관은 여전하답니다.

삭막한 가슴에 기쁨을 주는 꽃을 제 자리에 두지못하고 盜心을 유발케

만들었으니 내 죄가 더 큰것 같아요.
마루 끝에서 곁눈 짓을 나를 빤히 쳐다보는
수국이 도둑이라고 비웃는 것 같아서 영 마음이 편치가 않네요. 어휴...

그런데 나도 도둑인 주제에 오늘 아침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세요?.
제풀에 겁에 질려서 관할 면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혹시 수국을
심어놓은 주위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있냐고 물었더니
없대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 쉬고는 어제의 상황을 이야기했죠.(우리가 도둑인건 빼고)

6키로나 되는 수국이 심겨져있는 길에 일일이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려면
경비도  만만찮고,면사무소 직원들이 온 종일 지키고 서 있을 수도 없으니
중간 중간에 거짓부렁으로 "CC카메라 작동 중"이라고 붉은 글씨로 팻말을
세워놓으면 좋겠다고  조언까지 했지 뭐예요.
나도 도둑인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

진짜 못 말리는 여자예요. 전화선을 통해 면사무소직원은 그저 알려줘서
고맙다고 넙죽넙죽 절을 하고는 좋은 아이디어라며
면장님에게 말씀드리겠다며 이름을 가르쳐 달래요.
어머머, 절대로 안되지요. 소스라치게 놀라서 '이만 끊겠습니다' 하고
수화기를 얼른 놓아버렸답니다.

 

고해 성사처럼 내뱉고 나니 명치끝에 뭔가 매달려 있던 것이
좀 내려가는 것 같네요. 기회를 봐서 다시 제 자리에 갖다 심어 놓을 랍니다.
수국은 아무래도 좁은 화분보다는 흙 냄새가 물씬 나는 땅이 훨씬 좋겠죠.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야만이(본래 무일물本來 蕪一物) 훨씬 내 마음이 가벼워질것 같네요.

이러면 내 죄가 탕감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