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반려 동물세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504

자기 혁신과 관리


BY 수련 2005-06-16

-자기혁신과 자기관리-

<자기 자신을 분석하기>
Johari's window의 4가지 유형 중에 나는 B유형(hidden)에 속한다. 아니 속했었다. 나의 변화된 모습 전에는. 내 자신에 대해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으면서 남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는 스타일, 즉 자신의 욕구는 억제하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만 들으려 하므로 진실 된 인간관계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자기 방어적인 벽이 두꺼워 쉽게 남하고 어울리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나름대로 분석을 해 보려한다.
현재 나의 위치는 공직자인 남편과, 올 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아들, 초등학교 교사인 딸을 둔 주부이다. 집안형편상 고등학교만 졸업하였고, 대학원까지 나온 남편을 만나면서 나의 갈등은 시작되었다. 물론 그것이 꼭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편의 동문모임에서 부인이 고졸인 사람은 나 하나뿐이기에 살아오면서 '고졸'은 나에게 핸디캡으로 작용하였다.
거기에다 남편까지 아내가 대학졸업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는 통에 나의 입지는 더욱 곤란해졌고, 동문 모임에 가면 누군가가 어느 대학, 몇 학번이냐고 물을까봐 전전긍긍하게 되어
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방만 탐색하곤 했다.
그러니 자연히 진솔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물위에 뜬 기름 마냥 겉돌기만 하는 생활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식의 틀을 깨고 D유형으로 바뀌게 되었다. 계속되는 '나'의 이야기에서 그 연유가 드러나게 된다.

<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기 >

아이들을 키우면서 고졸의 벽을 넘으려 자아실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다양한 장르의 교양강좌를 찾아다니며 취미생활의 폭을 넓히기도 하고, 책을 많이 읽으면서 내 삶의 본질을 높이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적으로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졸업이 뭐가 부끄러운가. 그 시절에는 (1970년대) 대학을 진학 한 여성은 소수였고, 대다수는 취업이나 가사를 도우며 결혼을 준비하였던 시대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6남매를 키우면서 어려운 살림에 6남매 모두를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키려고 온갖 고생을 한 엄마를 생각하니 자꾸만 울화가 치밀었다. 차츰 내면에서 솔직해지자고 부르짖는 아우성에 어느 날, 남편에게 대들었다. 남 앞에서 아내가 대학졸업이라고 왜 속이는가. 더 이상 가면을 쓰기 싫다.그리고 두 아이에게도 고해를 했다. 고 아이들의 초, 중, 고등학교 가정환경조사용지 부모의 학력 기재란에 **대학졸업 이라고 써넣었던 것은 엄마가 잘못되었으며 엄마는 고졸이라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싶었는데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어머니. 그건 흉이 아닙니다.엄마가 고졸이라도 우리들의 엄마이니까요" 대학에 들어가면서 성인이 된 아이들은 되려 나를 위로해주었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딸아이는 기초 영어회화 책과 테이프를 사주며 공부하라고 하였고, 아들은 컴퓨터를 가르쳐주었다. 몇 몇 친한 주위 이웃에게는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내 입으로 한번도 대학출신이라고 말 한 적이 없다. 그냥 침묵으로 일관했으니까. 타의가 자의가 되어 위선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지난 세월이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내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투명한 삶에서 얻는 보람도 있을 것이라 믿기에.

<긍정적인 자아개념 확립 및 이미지관리>
(긍정적인 자아개념 확립)
차츰 남편의 직위가 올라가고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 할 즈음에, 잠잠하던 내면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졸'이라는 거짓을 벗어버리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안일한 나의 일상에 뭔가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밀려왔다. 덮어두고 눌러두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을 것 같은 평화로움이 어느 날 내 삶의 중심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학문에의 갈증. 그렇다.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졌다. 나는 늦었지만 공부가 하고 싶었다. '대학교'를 가고싶었던 것이다. 나도 진짜 대학생이 되어 대학졸업장을 받아보자' 그러나 망설여졌다.보수적인 남편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학을 간다는 아내를 이해해줄까. 아이들이 혹여 당혹해 하지 않을까. 며칠을 고심하다가 조심스레 남편에게 말을 끄집어냈다. 의외로 흔쾌히 승낙하는 남편과 엄마의 대학진학에 학군장교가 된 아들도, 졸업을 앞둔 딸도 나의 결정에 기립박수를 쳐주었다. 응원해주는 가족들의 후원에 힘이 났고,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 하에 긍정적인 사고로 새롭게 여는 내 인생에 도전장을 던졌다. 나의 거대한(?)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지 잘 알기에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미지관리)
남편이 공직에 있어 그 지역의 여성단체와 시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나갈 일이 많다. 공직자의 아내로서 옷차림도 단정해야하고 말 한마디에 신경을 써야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여질까 남편에게 누가 되어서는 안되기에 이중적인 행동을 할 때 도 있다.
그건 위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이미지관리를 위하여 때로는 고상한 척 내숭을 떨기도 하고, 말을 최대한 아끼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야말로 내가 실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많으면 자연히 실수를 하게되고 자신도 모르게 일상적인 자세가 나와 흐트러지기 때문에 모임에 나가서는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다. 고위직 공무원의 아내라는 신분이 일반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남을 의식하는 생활에 길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친한 친구들이나 이웃에게는 스스럼없이 속내를 털어놓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 드러내지만, 공식행사에서는 어쩔 수없이 최대한 이미지관리를 하게된다. 언젠가 안면 있는 여성단체회원 한 분이 행사를 마치고 같은 자리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뼈가 섞인 말을 하였다.
"아이구, 사모님은 능력 있는 신랑을 만나서 이런 좋은 대접을 받으니 얼마나 좋으세요?"
그 여자는 내 고등학교동창과 같은 단체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고, 자기와 같은 고졸이면서 남편의 사회적인 성공여부에 따라 여자의 팔자가 달라진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는 말투였다. 물론 옛말에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있다. 가난한 집 쌀뒤주 속의 바가지와 부잣집 뒤주의 바가지의 팔자가 다르다는 의미다. 갑자기 그 말을 들었을 때 곤혹함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웃으면서 슬기롭게 말을 받아주었다.(적어도 내 생각에는.)
"아, 예 능력 있는 남편을 만나려고 노력했죠. 그리고 내 남편이 공직생활을 잘 해내도록 내조를 열심히 했고요." "..........." 그 한마디에 더 이상의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물론 억지가 섞인 말인 줄 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달리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걸맞지 않는 인연으로 맺어졌지만 남편의 학식에,지위에 맞게 나를 변신시키고 내 스스로 내실을 다지며 자신을 재정립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고 유연한 사고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적을 만들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다른 사람과의 유대에 신임을 얻고있다고 자부한다.

<자신의 비전에 맞는 커리어계획수립>

그렇게 자연히 말을 아끼다 보니 어딘가에 나의 속내와 일상을 털어놓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컴퓨터를 배우면서 한 사이트에 들어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또 다른 나의 욕구를 분출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글을 쓰는 횟수가 점점 늘어가면서 문학에 대한 갈증이 고취되기 시작했다. 詩가 욕심이 나고 소설이 쓰고 싶어지고, 문학의 다양한 장르에 대해 체계적인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갈망에 대학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3년 전의 내 나이가 49살인데 그 나이에 오프라인으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무리였고, 또 남편의 잦은 인사발령으로 옮겨다니다보니 장거리 통학은 불가능하여 망설이는 와중에 매스컴을 통하여 사이버대학을 접하게 되었다. 문학을 공부하려면 해당학과를 찾아야했고 문예창작학과가 있는 경희사이버대학이 나에게는 적격이었다. 남들 눈에 띄지도 않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여도 아무 제약을 받지 않고도 집에서 온라인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등록을 하고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공부를 시작할 때의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오프라인 대학이 아니라도 학점취득으로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고, 나의 핸디캡으로 작용했던 대학졸업장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내 스스로 이루어내는 성취감에 도취되어 공부에 열정을 쏟을 수 있었다. 늦게 시작한 공부라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으로 일년 앞당겨 현재 조기졸업을 목표로 열심히 학점을 따내고 있고, 문학을 공부하면서 꼭 이루고 싶은 '등단' 이라는 작은 욕심도 부려본다. 아이들도, 남편도 중도 포기 할 줄 알았던 엄마가, 또 아내가 예상외로 졸업을 앞두게 되니 다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막상 한 학기만 하면 졸업을 한다고 생각하니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것을 느끼게 되었고,'여성CEO"론을 들으면서 내 자신에게 또 다른 동기부여를 하고싶어졌다. '대학원진학' 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슬며시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또다시 나의 의향을 전하니 가족 모두 찬성을 해주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원을 다니는 아들과 석사학위를 받은 남편이 '멘토'를 해주겠다고 나서며 나에게 용기를 더 실어주었다. 대학공부를 하면서 솔직히 좌절이 없었을까, 아니다. 시험때 마다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어깨가 내려 앉을듯이 아팠고, 장시간 보는 모니터앞에서 눈알이 빠질만큼 쓰리게 되면서 나이는 못 속이겠다고 비탄에 빠질 때가 많았다.하지만 대망을 품고 선택한 나의 목표에 주저앉을 수 없다는 도전적인 용기가 억지로 나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는 것을 보여주리라.'

공부를 다 마치고 나면 그냥 내 동그라미 안에서만 맴돌 것인가. 스스로의 만족에 안주할 것인가. 겁없이 작은 욕심을 또 부려본다.
학위를 따서 문학적 소양을 갖추어 내가 거주하는 지역의 사회복지단체에서 글짓기 교실을 만들어 가정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의 공부를 도와주고, 주부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 희망사항에 그치게 되더라도 일단은 적을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