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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생일 날.


BY 수련 2005-05-20

27년전 오늘, 아들이 태어났다.
 

임신과정부터 유별스러웠다.

결혼 후 일년 동안 임신이 되지않자

시댁에서는 조바심을 내었고 친정엄마는 겨우 일년밖에 안되었는데..

하면서도 큰언니의 전철을 밟을까봐 서둘러 인정쑥과

대추, 갖은  약재를 넣어 달여서 먹기좋게 졸여

아침저녁으로 한 숟가락씩 떠먹으라고 보내주셨다.
 

그 약효덕분인지 약통의 바닥이 드러날때 쯤에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임신 3개월에 들어 설 무렵에 

남편의 군부대 근처 서울 거여동에 살았는데 말이 서울이지

시골이었다. 부엌문을 열면 낮은 산 언덕이 보이고, 포장도 안된 길은

차가 지나가면 하얀 먼지를 일으키는 동네였다.
 

저녁준비를 하는데 웬 아가씨가 집을 기웃거렸다.

누구세요?. 여기가 이대위집이예요? 녜, 맞는데요.

쭈뼛거리며 서있는 아가씨뒤로 막 퇴근한 남편이 들어온다.
 

두 사람의 놀란 표정뒤의 반가움, 그리고 어색함.

그 아가씨는 남편의 옛 애인이었다.

남편이 결혼할 줄 모르고 소식이 없으니 물어물어 찾아 온것이다.
 

승리자의 아량이었던가. 부글 부글 끓는 속을 감추고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방안으로 들이고,밥을 먹이고, 커피를 마시고...
 

그런데 그 아가씨는 가지않고 미적미적 앉아 남편과 내 눈치를 살핀다.

남편과 잠깐 밖에 나가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내가 그냥 방에서 이야기하라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단칸방에 세들어 살던 터라 딱히 나갈데는 없어 그냥

주인집 마루에 걸터 앉아있었지만 도무지 그 아가씨는

갈 기미가 보이지않았고, 어찌하다보니 통금시간이 지나버려

할 수없이 한 방에 잠까지 자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의

위선적인 아량이 나를 더 힘들게 한 요인이 되었다.
 

어쩌다 눕고 보니 남편이 가운데 눕고 오른쪽에는 내가, 왼쪽에는

그 아가씨가 누운 형상이 되었다. 그러니 잠이 올리가 있나.

부스럭 소리만 나도 온 신경이 옆으로 쏠렸고,

숨막히는 적막한 시간이 흘러가면서 인내의 한계에

부딪힌 내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방문을 확 열어 제끼고 맨발로 밖을 뛰쳐나갔다. 미친여자처럼.
 

주인집과 다른 방에 세든 새댁네는 우리 집의 상황를 짐작하고

아슬한 마음으로 사태추이를 기우리고 있던 차에

한 밤중에 돌발사고가 발생하니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남편이 따라나오고, 주인집 아저씨가 , 새댁남편이 파자마차림으로

나를 잡으러 오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아가씨는 주인 집 딸 방에서 날을 새고

말없이 사라지고 나는 병원에 실려갔다.

팬티에 혈흔이  묻어나고 유산끼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주인집아주머니와 새댁과 이웃 아주머니들의 논란이 생각난다.

차라리 수술해서 유산해버리면 자궁안이 깨끗해져서

금방 애기가 들어설거야.

아니야 첫 임신이기때문에 잘 못하면 영영 임신을 못할수도 있어.

원인제공의 남편은 뻔뻔스레 유산은 있을수 없다고 펄쩍 뛰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피가 비쳐 손가락도 꼼짝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급기야 엄마가 올라오시고 아기가 자랄때까지 자리보전하여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고,

6개월로 접어들어 아이가 뱃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병원에서는

 이제 안심해도 된다고 했다.
 

만삭이 되어 출산을 앞두고 남편이 강원도 인제로 발령이 났다.

경남에만 살던 엄마는 강원도까지 따라가지못한다고 나를 데리고

마산의 친정으로 데리고 갔다.

오빠네와 같이 살던 엄마는 당연히 친정에서 몸을 풀어야 한다고 하는데

올케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올케도 둘째조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나보다 4달 뒤쯤이

해산달이다. 같은 지붕아래에서 다른 두 명의 애기를

낳을수없다면서 엄마와 내 눈치를 보더니 올케는 친정엄마를

불러왔고, 노골적인 안 사돈의 거침없는 말에

엄마는 두 말않고 나를 데리고  대구에 사는 큰 언니네로 갔다.

후에 생각해보니 올케도 친정에 가서 낳으면 될일인데 자기는

당당하게 친정엄마를 불러 시댁에서 몸조리하겠다는  배짱이 가당찮았다.
 

큰 조카가 딸인데 둘째는 아들 낳을거라고 꽤나 신경을썼다는

말을 엄마를 통해 들은터라 좋은게 좋겠다싶어 아무 말 않고 언니네로

갔지만 그 일은 지금까지 내 가슴에 앙금처럼 남아있다.

 그러나 올케는 또 딸을 낳았다. 나는 아들은 낳고.

그 둘째 조카를 3년전에 남편이 취업을 시켜주었다. 비굴하게

싹싹하게 구는 올케,보기좋게 앙갚음을 한 셈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일 년에 아버지,엄마 제사 때,  두 번만 친정에 간다.

가끔씩 집에 놀러오라는 전화를 하지만 바쁘다는 핑게로 절대로 안간다.
 

삼대독자에게 시집 간 큰 언니는 애기를 낳지못해 결혼 3년만에

이혼을 당하고, 재취로 갔는데 당시 형부가 몸이 안 좋아 대구 근교의

가창이라는 시골에서 젖소를 키우고 있었다.
 

엄마,인근에 병원도 없는데 갑자기 애기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걱정말거래이 내가 워낙 아~를 많이 낳아서 니도 쉽게 낳을끼구마.
 

무려 15명의 아이를 낳고 9명의 아이를 잃은 엄마의 무용담을

심심찮게 들은터라 정말 나도 쉽게 낳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엄마말에 의하면 밥하다가도 애기를 낳고,우물가에 물을 긷다가도 낳고,

빨래터에서 빨래하다가도 애기를 낳고... 그렇게 낳은 아기들은

죽기도 잘죽었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새 장가를 들었는데

엄마보다 어린 계모시어머니를 맞아들이다 보니

엄마하고 겨루듯이  아이를 출산했다한다.
 

시동생들하고 엄마의 애기가 같이 홍역을 하면 엄마는 서슬이 퍼런

시어머니때문에 당신의 애기는 뒷전이고 시동생들을 업고 다니느라

당신의 아기가 죽는것도 몰랐단다. 무지막지한 소설같은 이야기라

안쓰러움보다 엄마의 이야기에 웃음을 터트렸던 우리들.. 

어쩌면 엄마도 아이를 몇 명을 낳았는지도 모를수도 있겠다.

워낙 일에 지쳐 제대로 아이를 돌 볼 겨를도 없었다니.
 

5월의 따사로운 햇살에 언니의 시골집 주변은 짙은 녹음이

우거지고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자극하는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발자국 소리만 나도 엄메~ 소리지르는 젖소와 함께

오늘 내일 출산하기만을 기다렸다. 엄마와, 언니와 나는...
 

예정일보다 일주일이 지나도 조용하더니 어느 날, 배가 살살 아파오기시작했다.

엄마보고 빨리 병원가자고 조르니 아직 멀었단다.

나는 엄마의 위대한 출산경험만 믿고 아팠다가 괜찮았다가 하는 배와 허리를

감싸쥐고는 하루 하루를 버텨갔다.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미련한 행동이었던지...
 

아직 양수가 터지지않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만

주기적으로 아파오는 배를 안고 잠깐 잠깐 잠속에서

온갖 악몽을 다 꾸었다.

언니 집 앞으로 시할머니의 화려한 상여가 지나가고

시커먼 멧돼지가 부엌에 있는 나에게 덮썩 안겨오고. 젖소가

누워있는 방안으로 들어와 똥을 싸고.....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큰 언니는 신기해 하며 연신 내 배를 만지면서

어떤 놈이 들어앉아 이리 괴롭히노, 너거 옴마 고만

괴롭히고 퍼뜩 나오거래. 야야 배가 마이 아푸나? 우짜꼬.
 

엄마는 집에서 아기를 받을 요량으로 매일 물을 데웠고,

미역국을 한 솥가득 끓여놓고 기다리다가 5일 째 되는 날에

불안한지 안되겠다시며 형부에게 택시를 부르게 하여

대구시내 산부인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형부도 조바심을 내어 대구에서 제일 잘한다는  산부인과에 연락을

해놓고  대기 해달라고 전화를 미리 걸었다.

약전 골목 어디쯤인것 같다.
 

이제나 저네나 출산소식을 기다리던 남편도 때마침 휴가에 강원도에서

병원으로 바로 왔다.
 

뱃속에 든 놈도 병원에 가는 줄 눈치를 챘는지 그때서야 나올 기미를 보여

택시안에서 양수가 터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의사선생님이 보이고

간호원들이 왔다갔다하고, 의사선생님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이건 작아서 안되겠다. 이층에 가서 제일 큰걸로 가져와라.

어허 참 이놈이 안나올라카네 ..힘을 팍팍 주라카이.
 

못하겠다. 힘이 점점 빠져가고 엄마의 울음섞인 소리가 들렸다.

보이소 의사 선상님요 지가 미련해서 그란께 우리 막내딸 살려주이소.

아~는 우찌돼도 된께 우리 막내만 살려주이소.지발요...
 

어디선가 남편의 소리도 들린다.

아,아니요 아이도 살려주세요. 아이도 산모도 다 살려주이소.
 

흰옷의 간호원이 급하게 뭔가를 들이밀고 내 몸속의 모든것이 다 빨려나가는

느낌이들었다.

어허 그놈참, 고생마이했네, 쯧쯧..

아기울음소리가 들리지않았다.

어,엄마 왜 울지를 않아? 손가락,발가락이 열개맞아?

하모하모 열구락맞구마. 쪼맨한 꼬치가 딸랑딸랑 한대이.
 

병아리소리처럼 가느다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 뒤에 들으니 아기의 목에 태가 칭칭 감겨있어

입구에서 나오지를 못하고 걸려있어 머리를 걸어 빼내는

기계의 줄이 두개나  터져버려 마지막으로 큰 기계로 빼내었단다.

지금같으면 개복수술로 아이를 들어내면 되는데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는지 아찔한 일이다.  5일동안 뱃속에서 틀면서 태를 칭칭감았나보다.

 

시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 시댁의 아들들이 (시숙, 남편,시동생) 다 탯줄을 목에

감고 태어났다며 공줄이기때문에 불공을 열심히 들여라 좋다고 하셨다.

나도 남편도 가톨릭신자이니 불공에 맞가는 공을 들이면 되겠지 싶은 마음에,

유아세례를 시키고 지금까지 나의 기도속에는 항상 남편과 아이들이 들어있다.
 

임신 때부터 드라마같은 아들놈의 출산 과정을 이야기 해보니

지나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그 아가씨의 슬픈 눈, 미웠던 남편,

큰언니의 호기심에 웃음이 나고, 엄마이야기  대목에서는 눈에 이슬이 맺힌다.
 

아들놈에게 생일인데 미역국이라도 끓여주고 싶어 올라갈까 메일을 보냈더니

엊그제 왔다가셨는데 피곤하신데 오지말란다.

저녁에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할 예정이며 아침에 미역국도 혼자만 나왔단다.

주민등록을 보고 알아챘는가 보다.
 

오늘 저녁에 미역국을 끓여 남편과 둘이 먹어야겠다.

1979년 5월20일!

아들 놈 낳느라고 고생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