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간의 타향살이를 끝내고 작년12월에 짐을 싸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달에 한번씩 들러 손님처럼 머물다가 걸레를 발밑에 깔고는
발로 밀고다니며 실실 닦아놓고 도망치듯 새벽에 집을 나서곤 했었는데 ,
이제는 느긋하게 짐을 풀어 제자리에 넣어놓고, 무릎으로 기어다니며 꼼꼼이
구석구석을 깨끗히 청소하는데도 무릎이 아픈줄도 모르겠다.
작년에 작은 아이 짐까지 모두 올려보내 놓고나니,
집안에는 아이들의 물건이 없어지고 이제는 남편과 내 짐뿐이다.
이 아파트를 작년에 새로 분양받아 짐만 부려놓고 허겁지겁 들락거렸는데
이사와서 보니 베란다에 하루종일 햇살이 들고, 방 3개,마루...
그렇게 넓지도 좁지도 않은 알맞은 크기의 공간이 마음에 쏙 든다.
안방은 부부가 같이 쓰는 공동방으로, 맞은 편 작은 방은 컴퓨터를 놓고
내가 공부하는 방으로 만들고, 문간방에는 차를 마시는 한실로 만들고 싶어
예전부터 주어 모아놓은 고가구로 배치하여 아담하게 꾸몄다.
그런데,며칠지나자 남편이 "어이 마누라, 내 방도 하나 만들어주라"
"녜? 무슨 방? "
"잠근장치가 있는 책상도 하나 사주고, 내 책하고 옷가지도 내 방에
넣어주면 내가 다 챙겨입을께, 그라고, 당신이 젤 싫어하는 담배도 문 닫고
내 방에서 피울테니까 ..."
출근 때마다 전용 여비서처럼 와이셔츠,넥타이,양복,심지어 손수건,양말까지
챙겨줘야 입고 나서는 남자가 웬 낯선 말을 하네.
다 늦은 나이에 고시공부할것도 아니고, 또,마누라 모르는 무슨 비밀이 많아
잠근장치가 있는 책상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담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다.
그 놈의 담배는 왜 그리도 끊지 못하는지 원,
작년에 교육받으면서 졸업 할 때까지 담배를 못 끊으면 당신 아들이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웬걸,졸업식날 모두들 식장에 들어가는데 혼자서 담배 마저 태우고 늦게 들어가다가
동기생들에게 무안을 당하기도 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눈을 흘기며 "이제부터 나를 뭐라고 불러야되지요? "
앙팡지게 말하는 나에게 계면쩍은 소리로
"담배끊는 사람은 워낙 지독하니 상종을 하지말라는 말도 있잖아. 내가 그렇게 지독한
사람이기를 바라냐? 에이 좀 봐주라, 쬐끔만 더 있다가 끊을께." 그러면서 덧붙여 하는 말,
담배를 끊으면 무슨 낙으로 사냐는 남편이 얄밉지만 한편으로는 애처러워
베란다에 작은 탁자와 의자를 내다놓았는데,
그래도 명색이 우리집 가장이고 , 하늘같은 서방인데 어찌 모른척할 수있나.
문간방에 붙박이 장이 있어서 그 방을 남편방으로 만들기로 했다.
"저기 시커먼 물건들은 다른곳으로 치우면 안되겠나. 꼭 귀신 나올것 같애서 좀 치우거라이"
반닫이, 쌀통, 삼단장식장에 놓인 꾀죄죄한 항아리들,
오래전에 내가 만든 색이 바랜 바느질통. 할머니가 내다버린 그릇, 호롱이 들어있는
장석이 달린 키 낮은 찬장,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청동화로....
옛날에 하나하나 주어 모아놓은 것들인데, 남편은 주워올때마다
몽당귀신 붙어온다고 못마땅해 하며 내다 버리라고 했었다.
할 수없이 안방에 있는 문갑을 문간방으로 옮기고 고가구들을 안방에다 배치하였다.
방에서 갑갑하다고 마루에서 자는 남편을 안방으로 유도하기 위해
하늘거리는 커텐도 달고 침대도 들여놓았는데 고 가구가 안방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핑게로 다시 남편은 마루에서 자고,넓은 안방은 오늘까지 졸지에 나혼자 독수공방하고있다.
자물쇠가 달린 책상을 들여놓고 장식장위에
창고에 쌓아두었던 각종 방패, 상패, 전임지에서 받은 감사패들,
그리고 전임대통령에게 받은 훈장도 올려놓는다. 웃음이 나온다.
그 대통령이 퇴임할때 까지 꼽씹고,테레비에 나오면 채널을 돌리곤 하더니,
그 훈장과 상장은 왜 올려놓는지.....
대충 정리를 다 해놓고나니 마음에 드는지 둘러보며 흐뭇하게 씩 웃는 남편을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좋다. " 흠! 다 좋은데 저 그림은 떼고 전에 그린 내 초상화 걸거래이"
그림도 고가구가 그려진건 싫은가 .
연필스케치로 남편의 사진을 보며 상반신만 그렸었는데 당시는 본인을 닮지않았다고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던 사람이 이삿짐을 챙기다가 슬쩍 쳐다보니 지금 모습보다
훨씬 젊어보였나보다. 4년전그림이니 그럴수 밖에.
책상 앞에 남편의 초상화그림까지 걸어놓고 ,책꽂이에 남편의 논문과 책들을
꽂아놓고나니 한결 아늑하고 서재같은 분위기다.
어른이나 아이나 할것없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좋은가.
그 다음 날부터 거짓말처럼 아침마다 본인이 직접 양말,손수건 ,옷을 다 챙겨입고,담배까지
방에서 피우면서 베란다에 놓인 탁자와 의자는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어쩌다가 커피를 갖다주러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열면
황급히 설합문을 잠그며 열쇠를 감춘다.
26년동안 한 이불덥고 산 마누라에게 무에 그리도 감출것이 많은고.
도대체 설합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슬슬 괘씸지면서 자꾸만 궁금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