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 만에 경남에 많은 눈이 내렸다.
이웃집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눈덩이를 만들어 굴리는 모습이
우리 아이들과 눈사람을 만들던 오래 된 앨범 속의
영상과 겹쳐져 추억 속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성당에 다녀오는 마누라를 마중 나오는 척 하며
등산화에 모자까지 눌러쓴 남편이
반색을 하며 아파트현관 입구를 막아서며
동네 한 바퀴를 돌잔다.
장난스레 눈을 뭉쳐 나에게 던지기에
나도 응수를 하기 위해 눈을 만졌다가 차가움이 섬뜩해
그냥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뽀드득 뽀드득 발을 동동거리며 눈 위를 걸어다녔다.
이십 여분 지나니 추워지기도 하고 눈바람에
마냥 바깥에서 서성이기도 뭣하지만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는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아까워
사방이 유리문으로 되어있는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한산한 푸드점에 중늙은이 두 사람이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들어서자 아르바이트 학생이 뜨악한 표정이다.
남편은 셀프인줄 모르고 주문만 해놓고 어서 따라 올라오라고 재촉이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고맙게도 이층에 올라가 있으면 갖다준단다.
아마도 부모나이쯤 되는 어른들이라 봐 주는게지.
오전이라 이층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다.
창가에 남편과 둘이 앉아 눈 내리는 풍경속으로 들어간다.
묵묵히 눈을 맞으며 서있는 길가의 나무들과 함께
영화속의 주인공들이 되어보는데.
미운 정 고운 정의 해묵은 감정이
들뜬 연애시절의 달콤함은 아니지만
뜨거운 커피와 햄버거를 앞에 두고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속에서
남편을 클린트이스트우드로, 나는 매릴스트립으로
분장하여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식탁에 촛불을 밝히고 감미로운 음악을 틀어놓고
두 손을 맞잡고 그윽한 눈길을 주고받는다.
그때 왁자한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이층으로 올라오고,
조용한 음악은 시끄러운 랩송으로 바뀌고 말았다.
뒤이어 또 다른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들이닥쳐
보라 빛 영화는 중도에 멈추고 만다.
패스트푸드점에 어울리지 않는
중늙은이를 아이들은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이 신기해 하고
젊은 부모는 혹여 불륜의 관계는 아닐까하는 눈초리가 역력해 보인다.
흘끔거리는 눈길이 어색한지 남편은 느닷없이 전화기를 꺼낸다.
" 혜은아. 아직도 자냐? 여기는 눈이 오는데 거기는 안 오나?
퍼뜩 일어나서 밥 챙겨먹어라.
아빠는 엄마하고 눈 구경하면서 햄버거 먹고있다"
남편의 팔장을 끼고 집으로 돌아오니
동네아이들이 내 키 반 만한 눈사람을 만들어 아파트 현관앞에 세워놓았다.
눈, 코, 입을 나뭇잎으로 붙이고 동화 속의 눈사람처럼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밀집모자를 쓴 눈 사람이 문지기가 되어
우리 부부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