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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이야기


BY 수련 2004-12-31

    텃밭에서

 

 올해 봄부터 몇 해 전에 사두었던 밭을 개간하여 텃밭을 만들었다.
3월의 날씨는 꽃샘 추위 때문에 호미를 쥔 손끝이 시렸지만
난생처음 일궈보는 텃밭에 쭈그려 앉은 마음은 벌써 수확을 꿈꾸어 본다.
주변의 넓은 밭에는 아저씨의 콧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우렁찬 경운기의 소리에 겨우내 잠들었던 생물체들이 기지개를 펴고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고,
얼굴에 닿는 봄바람이 들썩거리는 나를 재촉한다. 장에 나가 씨앗과 모종을 요것 저것 사면서 가게 아저씨에게 심는 방법을 상세하게 물어보는 아낙이 못미더워 화분에다 씨앗을 심는 방법을 직접 시범을 보여준다.
{씨앗--상추, 쑥갓, 호박, 박. 도라지.
모종--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

 

<상추, 쑥갓>
 폭이 한팔 넓이에 길이는 3미터 정도의 밭에 반은 상추씨앗을 뿌리고 반은 쑥갓을 뿌렸다.
호미로 얕게 판 자리에 씨를 넣고 보드라운 흙으로 살짝 덮어놓고, 물 조리개로 씨앗이 드러나지 않게 매일 조심조심 물을 주었더니 열흘쯤 지나자 연둣빛 어린 싹이 나기 시작했다.
상추, 쑥갓 싹이 나자 덩달아 풀도 하나 둘 쏙쏙 고개를 내밀어 하루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상추보다 풀이 더 빨리 자란다. 매일 풀을 뽑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물을 주었더니 연한 잎들이 제법 나풀거려 솎아내어 겉절이 해먹으니 입맛을 돋운다. 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 중에 꾸뻑꾸뻑 졸고있으면 오늘 아침에 상추를 먹고왔나 하시며 교탁을 탕탕 두드리던 사회선생님이 생각난다. 상추밭 귀퉁이에 못다 뜯어먹은 쑥갓에 노오란 꽃이 피어  난데없는 상추밭에 꽃이 남실거려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호박, 박>
 호박씨앗을 이웃에게 얻어서 구덩이를 파고 두 세 개씩 묻었다. 박은 언덕 쪽 구석에다 씨앗을 묻었는데 위 밭의  영감님이 호박, 박 구덩이에는 썩인 음식찌꺼기를 넣어야 호박이 잘 열린다는데 어디서 구해오나. 할 수없이 퇴비를 씨앗 둘레에다 뿌려놓았다. 나는 호박을 즐겨먹지 않았다. 유년 시절에 오빠들이 못생긴 아이가 호박을 먹으면 더 못 생긴다고 놀리는 바람에 진짜인 줄 알고 호박으로 만든 반찬은 전혀 먹지 않았다.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씨앗을 묻었지만 주먹만한 애호박이 달려 나물을 해먹었더니 어찌나 맛있던지.  여름에는 어린 호박잎을 따서 밥 위에 찌고, 호박을 듬성듬성 썰어 밑에 깔고 갈치를 올려 얼큰한 찌개를 끓여 입이 미어지게 호박잎에 밥을 싸먹었다. 추석에 즈음하여 새색시의 미소 같은 하얀 박꽃이 열리고,꽃이 지고  그 끝에 달린 박을 따서 제사탕국을 끓이고, 채를 쳐서 박나물을 만들어 제사상에 올리니 조상님께 효부가 된 듯하여 뿌듯하였다.  

 

<도라지>
  보라색 꽃이 그리워 씨앗을 뿌렸는데 영 소식이 없어 매일 물을 주고 코가 땅에 닿을 듯이 엎드려 들여다보아도 흙 속에 묻힌 씨앗은 꿈쩍도 않는다. 다른 밭의 아주머니에게 애타는 마음을 전하니 거부재기를 덮어두란다. 달포쯤 지나자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고,밭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도라지밭에 머무르며  싹과 눈맞춤을 했다.

도라지노래를 부르며 마음은 하얀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꽃들이 하늘거리는 밭을 연상한다. 다니러온 큰언니가 도라지 밭을 보더니 혀를 찬다. 도라지보다 풀이 더 많다며 손을 걷어붙이고 풀을 뽑아내는데 반 평도 안 되는 밭에 풀이 한아름도 더 된다. 도라지인지 풀인지 분간도 못한다면서 호미 질을 하면서 탄식을 하는 언니보기가 부끄러웠다. 우여곡절 끝에도 여름이 한창 뜨거울 즈음 볼록한 주머니가 한 잎 한 잎 벌어지기 시작하고, 활짝 핀 도라지꽃들이 더위에 지치는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눈에만 담아두기에는 아까워 연신 카메라 삿타를 눌러대는 나는 어느새 사진 작가로 변신했다.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4월이 되자 각종 채소의 모종이 나왔다. 단출한 식구라 많이 심을 필요는 없거니와 처음 농사를 지어보는 나는 무리하게 많이 경작하면 오히려 실패 할 수도 있겠다싶어 오이, 가지모종은 두개만 사고 토마토모종은무려 10개나 샀다. 고추는 풋고추로도 먹고, 빨간 고추로 익으면 말려 김장양념으로도 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욕심에 덜컥 30모종이나 샀다. 일군 밭에 고추모종을 심어 놓고 보니 간격이 너무 좁아 며칠 뒤에 뽑아서 다시 심었다.
밭에 오가는 길에 다른 밭을 보니 까만 비닐을 씌워놓고 구멍을 내어 그 위에 고추를 심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비닐을 덮어 씌워놓으면 풀이 자라지 못 하기도하고 물도 자주 주지 않아도 된단다. 풀도 제대로 맬 줄 모르고 햇볕에 얼굴 드러내기 싫은 나에게는 안성맞춤이다 싶어 다음 날 다시 고추를 다 뽑아놓고 비닐을 덮고 구멍을 내어 고추모종을 새로 심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변덕을 부리는 마누라에게 농을 건다.
"그놈의  고추를 심었다가 뽑았다가 정신 없게 만들어서 제대로 자라기나 할란가 모르겠네"
그 와중에 30개였던 모종이 가지가 부러지고 짓이겨져서 스무개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길쭉한 고추가 주렁주렁 달려 여름 내내 따서 찬밥에 된장을 찍어먹으니 알싸한 그 맛을 어디에다 견주랴. 팔뚝 길이 만한 오이가 달리고 반질거리는 가지를 딸 때의 희열감,
빨갛게 익어 가는 토마토가 가지가 부러지도록 많이 달려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쥬스가 되어 다른 음료수를 사먹지 않아도 되었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속담처럼 한 해동안 집과 밭을 드나들며 부지런히 가꾼 덕분에 텃밭의 여러 가지 채소는 우리 집 식탁을 풍성하고 건강하게 만들었다.  생전 처음 텃밭을 일구면서 무리를 하여 정형외과에 다니면서 물리치료도 받고, 요령이 없어 호박을 밭 가운데 심는 바람에 호박넝쿨이 다른 작물을 휘감게 만드는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그 실수들이 내년에는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끝없이 돋아나는 풀에게서 生의 애착을 느끼며, 흙에서 삶의 여유를 찾았고, 꽃이 피어야만 열매가 달리는 영겁의 결실을 맛보았다. 자연의 순리에 한치의 거짓이 없는 흙에게서 세속적인 욕망과 집착의 껍질을 벗겨내며  혼탁한 나를 순화시킨 텃밭은
하얗게 내린 눈을 덮어쓰고  묵묵히 동안거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