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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BY 수련 2004-06-18

성 석제의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면서>


 이 단편은 제 2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이다. 성석제는 이 책에서 열 달에서 두 달 모자라 태어난 팔푼이로 태어난  황만근으로 하여금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이런 능청스러운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을 지니게 만들어낸다.  금방 황만근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듯한 대화하며 황만근의 죽음에 어울리지도 않는 묘비명을 기운 자리 보이지도 않게 갖다 붙이는 구성은 성석제 소설의 허구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독자에게 유쾌한 거짓말을 드러내며 주제나 교훈을 주겠다는 의도는 처음부터 배제하고 시작한 글 쓰기라고 봐야 하겠다. 성석제의 문체는 빠르다. 그러면서도 날카롭다. 표창 날 같은 날카로움이 그 속에 번득이고 있어 표정과 몸짓을 미묘한 심리의 기미를 그려내며, 그것들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의 전체를 놓치지 않는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주인공 황만근의 삶을 조롱과 모욕의 차가운 눈길, 날선 말들의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힘겹게 이어지고, 가난했다는 것, 조금 모자란 팔삭둥이가 있었다는 것, 사람들의 조롱거리였다는 것, 이용당하기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 한 사람을 빼고는 그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것, 팔푼이 황만근을 두고 선생 운운하는 묘비명은 아무래도 격이 맞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황만근의 순수하고 사심 없는 생애야말로 ‘선생’으로 시작되는 묘비명에 어울리는 아이러니를 엿 볼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황 만근'이라는 주인공을 통하여 허구의 세계로 이끌어 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품 분석>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면서  있었고,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면서 지금처럼 없기도 했던 존재에 불과한 황만근에 대한 이야기를 무한대의 시간 위에 펼쳐진 이야기의 축제이다.
마을의 반푼이, 아니 열 달에서 두 달 모자라 태어난 팔푼이 황만근으로 하여금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이런 능청스러운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소설가는 많지 않다. 금방 황만근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듯한 대화하며 황만근의 죽음에 어울리지도 않는 묘비명을 기운 자리 보이지도 않게 갖다 붙이는 구성은 성석제 소설을 읽는 맛을 그대로 보여준다.
작가는 본격적으로 농가 부채를 거론한다. 정부에서 대주는 농어촌 대출이 농민을 더 괴롭게 한다는 철퇴와 같은 호통.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작가를 대신하는 이가 만근인 걸 보니, 그는 본래 반푼이가 아니었나 보다. 뭐, 만근이가 반푼이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반푼이 같은 사람이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더 잘 꿰뚫어 보는 법이니까. 이런 저런 논리에 둘러싸여 있어도 알맹이는 언제나 단순 명쾌하지 않던가. 그래서 겉으로 똑똑한 척, 영리한 척 하는 사람들이 늘 더 크게 속는다. 국가에 속고, 은행에 속고, 사람에 속고.., 그래놓고도 만근이 같은 이를 흉보고 다니니, 세상은 참으로 요상한 곳이다. 황만근이 아들과의 대화에서도
모자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묘비명을 쓴 민씨의 귀에 황만근이 아들 님이라고 부르며 쩔쩔매는 것을 보고도 황만근이 죽고 난 뒤에 그럴싸하게 묘비명을 쓴 것을 보면 성석제 소설의 허구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팔푼이 황만근을 두고 선생 운운하는 묘비명은 아무래도 격이 맞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황만근의 순수하고 사심 없는 생애야말로 ‘선생’으로 시작되는 묘비명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죽고 난 뒤에 평생을 마을의 궂은 일이나 해주고 남의 손가락질을 받은 주인공의 묘비명을 '선생'이라는 명칭을 써가며 그럴싸하게 쓴 것을 보면 성석제 소설의 특징인 허구성에 실소가 터져 나온다. 소설 말미에는 소설 말미에는 한 등장인물이 ‘황선생’ 황만근을 향해 쓴 묘비명 형식의 글이 덧붙여졌다. 묘비명을 살펴보면 대충 이러하다.

-황만근, 황선생은 어리석게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해가 가며 차츰 선지(禪智)가 돌아왔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따뜻이 덮어주고 땅이 은혜롭게 부리를 대어 알 껍질을 까 주었다. 그리하여 후년에는 그 누구보다 지혜로웠다. 중략... 선생이 마시는 막걸리는 밥이면서 사직의 신에게 바치는 헌주였다. 힘의 근원이고 낙천의 뼈였다....중략...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할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소설뿐만 아니라, 다른 단편들도 살펴보면, 세태에 적응하지 못한 채 크고 작은 좌절을 겪는 ‘기인’들은 성석제 소설의 단골손님들이다. 표면적으로 소설은 그들의 기이하고 편집 적인 면모를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는 듯하지만, 실은 좌절 속에서도 본래 면목을 잃지 않는 그들의 ‘뚝심’을 통해 부박하고 탐욕스러운 세태를 고발하는 것이 성석제씨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전혀 사실처럼 보이지 않는 얘기를 능청스럽게 밀고 나가는 성석제의 독특한 문체는 이런 예외적 개인들의 삶을 다루는데 있어 빛을 발한다. 다른 단편에서도 엿볼 수 있는 기상천외한 거짓말을 사실처럼 꾸며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전혀 낯설게 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게 빠져들게 하는 것은 성석제 소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 널린 대상을 포착해 그것을 묘사하는 고전적인 방식이 아니라, 현실의 세목을 하나하나 수집하고 분해한 뒤 거대한 거짓말의 세계로 끌어들여 정교하게 재구성함으로써 기존의 소설문법을 유쾌하게 뒤집어 보이고 있다.
- “소설을 읽다 날밤 새던 대학시절 습관을 성석제 소설이 30년 만에 되찾아준다”고 했는데, 이런 특징은 그의 소설을 우리 이야기의 전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모든 이야기는 재미있다. 소설은 이야기다. 모든 소설은 재미있다”로 이어지는 삼단논법의 좋은 예로 성석제의 이 소설집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시인 김정환]은 말했다.
 "순수한 개성"의 소유자들로 해서 그의 소설은 "국가,,계급, 계층, 가문 등 전체성적 의미항을 중시하는 우리의 오랜 소설전통과, 나아가서는 한국사회와 근본적으로 맞서고 있다"[홍익대 국어학과 교수이면서 문학 평론가 정호웅]은 이 소설을 평하였다.

 

작가 연보


성석제 -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고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문학사상」시부문 신인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1995년 「문학동네」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97년 단편 '유랑'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고, 2001년 단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제27회 이효석 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으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새가 되었네」「재미나는 인생」「아빠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호랑이를 봤다」「홀림」, 장편소설로 「왕을 찾아서」「궁전의 새」「순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