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곱사등이에 관한 글들을 참고하기 위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심청이에 대한 폭탄선언을 발견하고 말았다.
"심청이는 불효녀."
무슨 뜻인가 싶어 잠깐 읽어보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그 곳에 있는 효녀 심청이.
목숨바쳐 심봉사의 눈을 뜨게한 심청이가 불효녀로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의 날짜가 언제였는지는 미처 살피지 못하였지만,참 신선한 충격이었다.
학교 다닐적이었던가?
놀부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해석이 서서히 시작되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심술궂은 영감 놀부는 나쁜 사람의 부류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사면을 받은 셈이다.
더군다나 시동생을 밥주걱으로 후려친 놀부 아내 역시나 함께 사면된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게으르고 자식만 무수히 낳은 흥부는 안쓰럽고 안된사람에서 앞날에 대해 대비책이 없는 그런 사람으로 전락해버린것은 당연지사다.
그렇게 달리해석된 '흥부와놀부' 이후로 심청이가 두번째로 기억된다.
이유는 눈 먼 아버지 심봉사를 무턱대고 돌보았기 때문에 아버지 심봉사는 홀로서기를 하지 못했다는것이 이유란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건 효(孝)와는 무관한 행동으로 휩쓸려 단정지어졌다.
아버지가 눈을 뜨고 심청이가 다시 살아난건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결국 시대를 뛰어넘어 오면서 심청이의 무조건적인 효는 약발이 받지 않는 것이다.
흥부의 무조건적인 형에게 의지하는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게으르고 나태한 모습으로 비춰진 것이다.
그러고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홀로일때의 외로운 모습보다는
홀로이지만, 일어서는데에 강한 모습에 박수를 보내주는 타입인 것이다.
나도 이 싯점에서 글을 멈추고 박수를 보낸다.
이 시대에 힘겹게 홀로서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감초 역할인 뺑덕어미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좀은 약삭빠른 듯한 모습이 냉철함으로 비유될까나?
글 속에조차 드러나지 않은 그녀의 교활함 비슷한 모습들은 어찌 바라보게 될 것인가?
그것까지는 지금까지의 해석으로 해석되지는 못할 듯 싶다.
그래도 아쉬움에 해석을 가미해야 한다면,이웃을 도와준 사람이므로 거기에는 점수를 55점 까지는 줄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인 "의좋은 형제"는 어떨까?
형제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그것도 달리 해석되어야하나?
아니면 아직은 해석을 달리할 시기가 아닐까?
깜깜한 밤 중에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형제애에 관한 해석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사랑이 자신의 가족을 생각지 않고,더군다나 아내와 상의도 없이
자기네 볏단을 쌓아올린 그 사랑은 허물어야 마땅하단 말인가?
지금 여성의 사회변혁에 맞춘다면 그것은 여성을 무시한 가부장적인 남성의 행동임에 분명하다.
어찌보면 그건 지탄의 대상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 일하던 농경시대에 여성도 함께 일을 했을터인데도 불구하고 단도직입적인 혼자만의 판단으로 살금살금 논으로 나간 형제의 사랑이 진정 사랑으로 허용되어야 하는건지...거기에 굳이 내 생각을 넣는다면 마땅히 따라주리라는 아내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하다는 생각뿐.
작품이란 한 시대만 살아있는게 아니다.
사람들이 명맥을 잇고 작가들이 숨을 쉬며 앞다투어 작품을 생산하는 한은 살아있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작품 자체에 흥미도 있지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도 흥미를 더하여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해석을 달리한다는건 그 작품의 작품성이 있다는 뜻으로 나만의 해석을 해본다.
지금도 작품 구상에 힘쓰는 작가들 역시나 몇 세대를 이어가도 여러가지 해석으로 화두에 오르는 작품들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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