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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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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BY 캐슬 2009-05-20

나비

정 은영

꾸역꾸역 밀려드는 노을빛이 화단 옆에 쪼그리고 앉은 내 얼굴도 붉게 물들인다.

가루분 통 같은 방 안에서 곰방대에 봉초를 채우던 고모의 눈동자는 허공에 머물다가 간간이 팔랑개비 같은 손으로 이리저리 꽃과 잎사귀 사이를 헤집으며 나비를 쫓는 나에게로 향하기도 한다.

“봉숭아 꽃잎은 떨어지지 않게 해라. 나중에 점자언니 오면 손톱에 물들여주마.”

고모는 이마를 가로질러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다시 틀어 올릴 양으로 비녀를 빼 치마폭에 얹어 두고는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린다. 고모의 목이 얼마나 배들배들 말랐는지 목울대를 지나 귀 아래로 굵은 힘줄이 불끈 선다. 황새처럼 가느다란 고모의 목을 보고 아버지는 과부가 되어 아이들과 살려고 애쓰는 누이가 불쌍하다고 하셨다. 가늘고 긴 머리채가 몇 번 틀어지더니 은비녀가 머리카락 속으로 숨어든다.

고모는 강단 있는 여자였다. 여자 혼자 네 아이를 키우자면 마지막 마음 한 자락까지 벼르고 별러야했을 게다. 네 아이들 밥을 굶기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발을 동태 굴리듯 굴려 움직여야 했으니 단 한 순간도 삶이 고단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숨어드는 사내들의 유혹에 마음을 쟁여 매며 하루하루를 지내야했던 고모를 남들은 하기 좋은 말로 강단 있는 여자, 드센 여자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고모는 늦은 밤 잠 자리에 들기 전이면 물세수를 정성스레 하고는 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잠결에 들리던 고모의 깊은 한숨이 얼마나 절절하게 들리던지 어린 나는 잠이 달아나 한동안 다시 잠들기가 힘들었다.

내 나이 열 살 들던 그해였다.

고모의 큰 딸인 점자 언니가 우리 집에 와 있다가 열아홉 살에 공장에서 일하던 수돌 오빠와 정분이 나고 말았다. 열아홉 살의 언니는 모든 걸 다 버리고 수돌 오빠를 따라 가겠다고 했다. 기함을 하신 엄마가 고모에게로 연락을 넣었고 고모가 시골에서 허위허위 올라오셨다.

엄마는 점자언니와 수돌 오빠를 안방으로 불렀다.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앉아있는 고모를 대신해서 엄마가 점자언니에게 거듭 다짐을 두자 언니는 질금질금 울면서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나는 저 사람 따라 갈랍니더.”

“외숙모는 네 마음속에 뭐가 들었는지 한 번 들어가 봤음 딱 좋겠다.”

엄마의 매운 목소리를 듣고 앉았던 언니가 방바닥에다가 검지로 동그라미만 그리고 앉아있다.

“가진 것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어미를 보고 컸으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이 철부지야. 칠남매의 맏이 노릇 그거 아무나 못한다. 그래도 수돌인지…… 숫돌인지 그래 그 놈을 꼭 따라 갈 거냐.”

고모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 따라 갈랍니더.”

언니는 고모를 올려다보더니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분명하게 말을 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않아있는 엄마와는 달리 고모는 눈을 감고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다가

가느다란 목에 두른 머플러를 더듬어 여미려는 듯 손이 목으로 갔다.

“오냐, 잘 살아봐라. 이 어미 버리고 가는 너를 위해 장구치고 박수까지 쳐 주마. 아나 이거 가지고 가거라.”

고모의 머리채에서 빠져나온 은비녀가 언니 앞으로 던져졌다.

언니가 떠나던 날 고모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오신 일이다. 고모의 짧은 머리모양에 놀란 아버지와 엄마의 표정을 보던 고모는 ‘밥만 먹고 세월가면 머리카락은 길어 나온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이후 은비녀가 없어진 고모의 머리카락은 여태 짧은 길이로만 남아 있다.

“언니 간다.”

나머지 작별은 손으로 하려는 듯 골목어귀에서 언니는 나에게 두어 번 흔들어 주고는 수돌

오빠를 따라가 버렸다. 고모와 엄마의 말을 거역하고 가는 언니가 미워서 ‘언니야 잘

가’라는 말은 생각과는 달리 입속에서만 맴돌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 내 방에서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고모는 한지 바른 장지문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

운 뒤란 대숲이 한정 없이 깊고 울울해서인지 밤새 한 숨도 잠들지 못하셨다. 고모의 곰방

대의 불도 오랫동안 꺼졌다 피어나기를 수없이 해서 눈과 코가 매웠던 나도 덩달아 잠을 설

치고 말았다.

이제 시간이 흘렀고 세월이 가니 나도 고모처럼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하나 둘 주

름살이 늘어가는 대신 세상을 보는 눈도 깊어질 줄 알았다. 내가 나이를 보듬어 주는 만큼,

받는 것 얻어지는 것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그릇된 계산이었다.

어리석게도 나이 드는 게 조금도 두렵지 않았던 지난날 나는 마흔 살을 애타게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마흔은 완벽한 나이로만 여겨져 언제 마흔이 되나 하고 기다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한 살에 또 한 살을 보태는 것은 순전히 손해 보는 걸로 이제는 깨

닫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도 버려지지 않는 못된 습관과 고집들, 쓸데없는 늘어만 가는 잔소리. 나이가

보태어질수록 점점 감추고 여밀 것이 많아진다. ‘사람이 늙기는 바람결 같고 덧없는 세월

에 백발이 되누나.’ 라는「청춘가」의 구절에 고개를 새삼 끄덕이게 될 나이가 쉰이었다

가, 막상 쉰이 되면 다시 예순으로 미룰 것이고 예순이면 또 일흔이 되면 이라고 핑계를

댈 것만 같다.

풀 내가 상크름한 오후, 작은 주방 창으로 노란 볕뉘가 들면 나는 까닭 없이 몸이 밸밸 꼬

인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게 귀찮아서 화장대에서 나비 핀을 찾아 앞이

마 위 머리에 꽂고 거울 앞에 서본다. 거울 속에 고모가 보인다. 아니 자세히 보니 나 자신

이다. 나비 핀을 꽃은 여자는 고모였다가 나였다가 한다.

고추 모종 때문일까. 하얀 나비가 삼 층까지 날아들었다. 마당으로 내려섰더니 담쟁이 넝

쿨이 타고 올라간 벽엔 푸른 이끼가 드문드문 끼어 있고 햇빛이 비낀 자리에 껑충하게 돋아

난 잡초에 손이 간다. 풀을 뽑고 있는 나에게 딸이 웃으며 ‘엄마 머리위에 나비가 앉았네

. 귀엽다’라며 허리를 젖히며 웃는다. 이 나이에 나비 핀이라니 멋 적은 웃음이 나온다.

아직은 나비 핀이 어울리는 나이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