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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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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BY 캐슬 2006-07-11

 

                           비밀


                                              


  우편함에 담겨져 있는 몇 통의 우편물이 오늘은 집 주인의 문 밖 출입이 없었음을 말해 주는 듯하다.  우편물을 손에 들고 대문을 밀어보니 스르르 문은 소리 없이 열린다.

이층으로 오르며 아이처럼 엄마~를 불렀다.

 “오냐 나 여기 있다’

현관문을 밀어보니 마법의 문처럼 스르르 열린다. 욕실에서 머리를 감으시던 아버지와 손에 거품을 묻힌 엄마가 웃으며 돌아보신다. 아버지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시고 엄마는 아버지의 등 뒤에서 머리를 감기시고 계시다. 나 어릴 적 엄마가 머리 감겨 주시던 모습과 꼭 같다. ‘아버지 머리 감으시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아무도 없을 방들의 문을 열어본다. 언제 이 방의 주인들이 있기나 했더냐? 고 묻듯이 잘 정돈되어져 텅 빈 방안은 알맹이가 다 빠져나간 콩깍지의 껍질처럼 휑하다.

 ‘다 됐다 인제 내가 아버지 비서다. 머리도 못 감는다고 감겨 달라하고 귀찮아죽겠어.’

라며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욕실에서 나오시는 엄마의 얼굴이 환하시다. 싫다고 말씀은 하시는데 얼굴은 싫은 빛이 전혀 아니다. 늘 아버지를 온전히 가지고 싶어 하셨던 엄마의 행복한 모습이다. 마침 너 좋아하는 찹쌀 수제비 하려던 참이라고 방앗간에 잠시 갔다 오마 하시는데 아버지는 어디 가느냐며 물기가 덜 마른 머리카락으로 같이 가시겠다며 엄마의 뒤를 따라 나가셨다.

 마당의 노란 국화가 시들하게 말라가던 어느 날 마흔 몇 살의 여자가 평상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여자는 마루 끝에 앉아서 먼데 하늘가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엄마 뭐해”

대답 없는 엄마를 다시 불렀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조각처럼 대답이 없다. 곁에 다가 앉아 쪼그리고 앉았을 때  엄마의 얼굴위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얘야 사람이 사는 게 참 덧없다.  뭐 하느라 벌써 이 나이가 됐을꼬?”

엄마의 음성은 너무 낮아서 슬프기까지 했다. 자분자분 풀어내는 엄마의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너무 벅차 나는 엄마의 깊은 슬픔의 냄새에 코를 박고만 있어야 했었다. 이후에도 엄마의 우울한 모습들은 며칠씩인가 보였다 사라지고는 했다. 가끔 혼잣말로 죽어버렸으면 하시던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날것만 같은 불안함으로 엄마 곁을 잠시도 떠나지 못해 안절부절 하던 날들이었다.

 엄마를 이해하게 된 건 내가 결혼을 한 이태의 일이였다. 늘 영화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술도 노래도 사랑했으며, 더불어 여자도 사랑하셨다. 언제나 소 등잔의 부던지처럼 아버지와 함께하는 애첩이 있었다는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엄마가 겪으셨던 마음고생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였지만 한 번도 내색을 않으셨고 나 역시 알고 있다는 표시를 내지 못했다.

 이제 너도 결혼을 했으니 이야기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이야기한다고 하시던 엄마의 낮은 목소리는 가을 바람소리처럼 서걱거렸다. 한 번도 아버지의 외도를 밖으로 내색 않으셨던 엄마를 이해하기는 지금도 힘들다. 아버지 또한 엄마에게 험한 언사를 하지 않으셨고, 술로 인한 주사나 주먹질 따위도 없었으니, 두 사람 모두 완벽한 공범자이셨다. 나 같으면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할 수많은 나날들을 엄마는 어찌 견디어 내셨느냐는 물음에 주시는 답이다.

“다 너희들 때문이다. 너희들 알고 나서 충격 받아서 자식농사 망칠까봐 참고 지냈지. 너도 오늘 이후 동생들에게 절대 비밀이다. 동생들도 결혼하면 그때 한명씩 너처럼 일러 줄 터이니 절대 비밀이다.”

엄마의 당부로 나 역시 엄마의 비밀의 공범자가 되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게 되었다. 이후  한 사람씩 동생들이 결혼을 하고 비밀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젠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의 지난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아버지만 모르는 비밀로 남았다. 우리는 다 알고 본인만 모르는 비밀이 비밀로 남아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존심을 위해 아내인 엄마가 남겨둔 마지막 선물인 것이다.

 우리 형제들이 행여나 아버지의 예전 잘못을 지적하며‘엄마같이 사는 사람 어디 있느냐’고 타박의 말을 꺼낼라치면 ‘아버지가 나한테 잘못했지 너희들에게 부족하게 한 게 무에 있느냐’고 말 해 보라 하신다. 엄마의 단호한 질책에 기가 질려 아버지의 잘못을 생각해본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말 우리에게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사실은 엄마가 지극하게 아버지를 공경하시니 우리들도 아버지에게 잘할 수밖에 없다. 이제 칠순이 넘으신 아버지가 엄마와 함께이시다. 가볍게 지나간 뇌출혈로 인해 오른쪽 수족이 약간 불편하시지만 극진한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시고 좋아하시던 TV영화 채널에 행복하게 빠져 계신다.  

 찹쌀 수제비를 끓여내어 오시는 엄마에게‘ 잘 먹겠습니다’하고 공손하게 말씀하신다. 화들짝 놀라는 나에게 아버지는 요즘 너희 엄마한테 하루에도 몇 번씩 감사의 절을 한다고 하시며, 너희들도 서로에게 감사하며 이렇게 살라는 당부의 말까지 덤으로 얹어서 하신다.

늦은 감이 있지만 두 분의 다정한 모습에 지나간 아픈 이야기들은 잊기로 한다.

 서로를 지켜주며 남은 생 동안 친구처럼 살아갈 두 분이 사랑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부족하지 말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