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엔 바람이 불었고 T.V에선 이쁜 몸 짱 아줌마가 출연을 했다. 나도 저럴때가 있었는데 하는 부러운 마음으로 그 시절을 그려 본다. 갑자기 아래 위 층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나더니 밖이 소란스러워진다. 나가볼까? 하다가 귀챦아 그냥 이불 속으로 파고 드는데 갑자기 쾅! 쾅!쾅! 우리 집 대문이 부셔질 듯 두드려진다.
누구?라며 현관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 보니.
"119입니다. 옆 집에 불이 났어요. 빨리 피하세요!."
"네?"라고 대답은 하면서도 잔뜩 미심쩍은 마음으로 하며 밖을 내다 보니 벌써 마당엔 연기가 자욱하다. 정말 정신이 하나 없었다. 아들 방의 문을 열고는 아들아 불났어!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이내 빨리 딸 아이 방 문을 후다닥 열었다. 임마 불 났어 빨리 일어나! 마구 마구 고함을 질렀다. 아이들은 잠에 취해서 빨리 일어나지 못한다. 겨우 일어나나 했더니 ... 두
아이는 침대 위에 앉아 엄마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다. 꿈인까?하고 생각하는 얼굴이다.
"불 났단 말이야. 이건 실제 상황이야!. 빨리 일어나란 말이야! "
나는 악을 쓰며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나는 어떡해야지 뭐해냐 되냐구…뭘 가져나가야 되는거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 들을 중얼거리며 집 안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했다. 딸이 얼른 일어나지 않아서 머리채를 사정없이 잡아 당겼다. 안 방 문을 열고 귀중품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몇가지 가방에 막 챙겨 담고 점퍼를 걸치고 아이 둘을 데리고 골목으로 뛰어 나갔다.
골목엔 구경꾼들이 이미 가득했다. 그동안 얼굴도 잘 몰랐던 이웃사람들도 모두 나와 있었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들 녀석은 전기 계량기를 모두 내리고 나왔다는 말을 한다. 역시 남자는 다르구나 생각했다. 119대원 아저씨의 호스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하늘 높이 솟아 오르던 검은 연기가 줄어 들기 시작했다. 불 길도 잡히고 한숨을 돌릴때 두 아이가 물었다.
"그런데 엄마 가방에 가져나온게 뭐에요."
"응 이거…몰라. 나도."
그제사 가방을 열어 보니...세상에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동창 모임의 노트였다. 집 문서도, 예금 통장도, 현금도, 지갑도 아닌 동창 모임의 노트. 황당해서 웃음 밖에 안나왔다. 딸도 아들도 이웃사람들도 모두 웃느라 정신없다.
"그런데 넌 불 났다고 하는데 왜 빨리 안 일어나는 거야?"
"응 그건 엄마가 내가 잘 안 일어나니까 거짓말 하는줄 알았지 뭐!"
"야 임마 거짓말 할게 따로 있지?"
조금은 여유있는 말도 주고 받게 되어 갈 무렵 남편이 연락을 받고 뛰어 왔다. 그제서야 너무 무서웠던 눈물이 훌쩍훌쩍 난다. 식구들 모두 무사하고 우리 집에 불 안 옮겨 붙고 얼마나 다행입니까? 집이 무사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집이란?
따남과 돌아옴의 안주하려는 욕망과 벗어 나려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표상입니다. 우리가 집이러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비바람과 추위를 막고 숙식을 해결하는 구조물로서 만이 아닌 정서적 공간의 의미도 갖는다. 가족이 함께 살아 숨 쉬는 곳,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100년도 넘게 유지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은 아무리 튼튼하게 지어져도 몇 해를 버티지 못하고 폐가가 되어 버린다. 사람은 집에 길 들여지고 집은 사람에게 길 들여진다.
천안문 사태의 주동자로 프랑스에 망명한 중국 작가 야딩은 "물이 샘으로 돌아가고 씨앗이 흙으로 돌아가듯 사람은 자기 은거지로 돌아간다. 사람은 새끼 새이고 배고픈 고양이이며 병원에서 나온 환자다. 자기 집이란 정확히 무얼까? 잠을 잘 수 있는 침대이고 냉장고에서 약간의 소시지를 발견하는 부엌이며 넓은 거실일 뿐만 아니라 라벤더 냄새가 나는 욕조이고 ...마음대로 구두를 벗어 던지기도 하고...멋대로 소파에 드러눕기도 하고...그럴수 있는 곳" 이라고 표현했다.
덧붙이자면 집은 우리가 등 뒤에 쳐 놓은 배수진이고 적진에서의 퇴로이며 우리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루를 끝내면 집으로 돌아간다. 휴식을 위해, 내일을 우해서 말이다.
집이 귀하다는 표현만으로 집의 소중함을 어찌 다 하겠나 마는 달리 표현할 재주가 없음이 죄송 할 뿐이다. 불이 나서 빨간 불 자동차가 우리 골목 우리 집까지 올거란 상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일이다. 불은 다행히 옆 집만 태우고 꺼졌다. 다행히 옆 집은 철거하려고 입주자가 모두 이사한 뒤라 인명피해도 없었다.
직접보니 와~ 119 아저씨 진짜 멋있드라! 진자 짱이드라! 짱!.딸 아이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119 소방대원들에게 폭 빠졌다. 내가 봐도 그 분들이 멋있는건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있은지 며칠이 지났지만 지금도 매캐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우리 집 마당을 넘나든다. 타다 남은 빈 집은 흉물스런 모습으로 남아 있다.
우리 집이 무사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