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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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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벼락처럼, 아름다운


BY 아미라 2007-12-20

그후로 8년

 

     현석은 승준의 부대로 찾아가는 길이다. 유학을 결정했고 입학허가서도 받았고 항공권도 구입했고 셋방도 빼었고 짐정리도 마쳤다. 뒤끝없이 말끔히 하고 떠나려해도 그의 능력으로는 도대체 정리할 수 없는 것이 하나 남은 것이 있다면,  승준에 대한 그의 마음이다. 그에 대한 승준의 마음이다. 그냥 좋은 선후배였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좋은 선후배로 언젠가는 돌아와서 허허 웃을수 있게,  그렇게 되도록, 좀더 명확하게, 둘의 관계를 정돈해두자, 결심하고 걷는 길이다.

 

 

     한편 현석이 제대를 하고 유학의 길에 오른다는 소식을 둘러둘러 듣게된 승준은 갑자기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한 마디라도 해주지..  ‘ . 승준은 부랴부랴 휴가를 얻어 상경하는 열차에 뛰어올랐다. 이렇게 보내야 하나, 이렇게 헤어져야 하나, 이렇게 마지막을 각오해야 하나.. 가슴이 쿵쾅거렸다.

 

 

      승준은 휴가중이라고 했다. 친구의 낡은 승용차를 빌려왔던 현석은 힘없이 오던길을 되짚어갔다. 낭랑한 목소리의 그 친구를 이제는 볼 수 없겠구나 생각하니 쓸쓸해졌다.'한 마디라도 해줄걸… ‘ 머얼리 서울행 열차가 내달리고 있었다.

 

 

     현석이 이미 떠났다는 것을 안 승준은 온몸의 맥이 풀렸다. 뜨거운 햇살 아래 울창한 나무 그늘이 시원한 줄도 몰랐다. 그저 그 아래 주저앉아서 하염없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훔치는 승준이다. 그해 여름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오미란은 솔직하고 무모할정도로 용감하기까지 하다. 신입주제에 사내에 비치된 ‘경영혁신건의함’을 가장 열심히 이용하는 소수 중의 하나이다. 건의서에는 당연히 본인의 부서와 직위, 이름까지 명기하게 되어있는만큼, 건의서 한장에 승진점수 일점이 깎인다는 소문이 은근히 돌고 있는 것도 그녀는 무시해버리는 눈치다. 

 

- 나랑 사귈래요?

 

그 대략난감 스타일의 오미란이가 어느날 불쑥 생뚱맞게 물었다. 승준은 저절로 열린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 왜요?
- 나한테 커피 뽑아주셨잖아요.
- 커피는 과장님에게도 뽑아주는 데요
- 저번에 길에서 저 짐 들구 바둥거릴때 택시 잡아주셨잖아요
- 제가 이제까지 택시 잡아준 사람이 스무 명도 넘는데, 다 기억 못합니다
- 야근도 같이 해줬잖아요. 나 혼자 무서울거라고.
- 오미란씨!
- 그럼 이번엔 이승준씨가 나 좋은 이유를 대봐요
- 뭐,뭐요?

 

   무모한 행동만 제외해두고 생각한다면, 오미란은 확실히 능력있는 사원임이 분명하다. 입사성적이 차석이었다는 소문이 그저 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승준은 짐작한다.  다만 밝게 통통 튕기는 순간에도 어딘지 외로워보이는 것이, 아무리 사회 초년생이라도 스물이 넘은 아가씨로서는 너무나 세상 물정을 모른다 여겨지는 것이, 승준의 시선을 끌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관심이 지나친 친절로 포장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같았다.

 

- 애인없죠?
- ..

 

보통 사람들은 ‘애인 있어요?’라고 묻는다. 다짜고짜 ‘애인이 없지?’라고 묻는 것은 아무리 묻는 쪽의 바램이라고는 해도 듣는 사람에게는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애인도 두지 못할만큼 매력이 없다거나 실력없는 사람이 아니냐고 질문당한 기분을 들게하기 때문이다.

 

- 애인없고, 갖고 싶지도 않고, 이런 질문 더이상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대답 이젠 안합니다.

 

   승준은 조금 단호하게 미란을 바라보았다. 그저 당신을 동료로서 좋아해,라고 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만다. 워낙 오해를 잘할것같은 여자라서 앞동가리 빼고 뒤에 좋아한다는 단어만 물고 늘어질 것같다. 그래봐야 미란은 별로 상처도 받지 않을 것같긴 하지만.

 

     승준이 몸을 담고 있는 개발부서의 총책임자가 이사로 진급해 부서를 떠났다. 그리고 약간의 자리변동과 함께 몇몇 신입들은 벌써 대리진급이 공시되었다. 그해 신입사원들 중에서 유난히 인재가 많이 배정되었다는 개발부서에서도 두사람이나 진급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오미란과 이승준이다. 공석인 부장에는 사장이 직접 미국까지 가서 스카웃한 전혀 새로운 인물이 임명될것이라는 소문이 사내 안팎으로 벌써부터 자자했다. 그날 미란과 승준은 조촐한 자축파티를 갖기로 의기담합했다.

 

- 이상하다, 올때가 됐는데..

 

미란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스탠드 바의 입구를 연신 힐끔거린다.

 

- 누가 오기로 했습니까?
- 부장님이요
- 네?
- 새로 부임하실 부장님이요. 아빠가 초대하셔서 어제 한번 봤거든요
- 아빠? 부장님? 두분이 서로 아는 사인가보죠?

 

미란은 대답대신 키득 웃는다. 어느새 취기가 돈듯 얼른 제손으로 입을 가리며. 그때였다. 누군가가 뚜벅뚜벅 다가오는 묵직함이 느껴진 것은.

 

-  오미란씨?

 

하는 음성에 승준은 저도 모르게 튕기듯이 일어났다. 현석이었다. 승준과 현석의 시선이 허공에 얼어붙는 순간이었다. 의식이 없는 미란은 이제 아예 테이블 위에 엎드려있다.

 

 

  미란의 집을 아는 현석이 그녀를 자신의 차 뒷좌석에 뉘여놓고는 앞문을 연다.

 

- 타라.


    8년 만에 돌아온 현석은 전보다 훨씬 자신감에 가득찼고 멋있어보였다. 미란을 데려다주고 오는 내내 두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현석이 차를 강변에 댄다. 그가 내리자 승준도 따라내렸다. 반갑다고 해야할텐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갑작스런 그의 등장이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여져야 할지 머릿속에서 수습되지가 않았다. 

 

- 같은 회사에 입사한 줄 몰랐다. 오랜만이다.
- 언제 오셨어요? 저야 박터지게 시험쳐서 들어온 거지만, 선배는 스카웃 되신 거라면서요. 역시..

 

역시 선배니까, 아무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승준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현석은 피식 웃는다.

 

- 넌, 여전히, 아직도 내가 뭘해도 그렇게 자랑스런 표정이구나

 

승준은 멋적게 슬쩍 웃었다. 문득 현석의 웃음이 사라지면서 말갛게 승준을 본다.

 

- 나도 그렇다. 니가 자랑스럽다.

  

  비로소 승준은 오래전 현석이 느꼈던, 자신들을 엮는 운명의 손길을 느끼기 시작했다. 절대로, 둘은 헤어질 수 없다는. [다음회에 계속]

 

* 당 작품은 국제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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