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엘리베이터의 세 여자'
원작 : 아미라 리
연락처: 이멜 egyk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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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첨이 아니예요.라고 말머리를 다시 연 건 뜻밖에도 악어백여자였다.
우리는 잘나가는 여자를 위로하기 위하여 10층의 까페를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흐느낌이 절로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역시나 잘나가는 여자라서 주위의 시선을 무척 의식했다. 차 한잔이 들려오기도 전에 그녀의 울음은 씻긴 듯이 사라지고 낭랑한 음성이 된다. 원래 그렇게 카나리아같은 목소리를 지닌 달콤한 여자였던 것같다. 어머나 스킨다브스를 잘도 가꿔놓았네. 저거 잎이 참 잘 마르던데. 그렇지 않아요? 어머머 저기 아이비 늘어뜨린 것 좀 보세요. 아이 앙증맞아. 문득 이여자를 위로하자고 여기까지 쭐레쭐레 따라온 내가 우스워진다. 오늘은 여러번 내가 우습다. 이상한 날이야.
이런 고통을 겪은 것 가까이에서 본것 연기한 것 그거 다 합치면 소설책 열두 권을 써도 모자랄껄. 길이 없더라구요. 그 슬픔을 해소할 길이. 자기 일을 가지면 모를까. 뭔가에 막 자신을 집중시키면요. 그럼 좀 나아지던데. 누구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고 악어백여자가 말했다. 독백처럼 들렸다. 나는 아프리카산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악어백여자의 눈이 잠깐이지만 휘둥그레지는 것을 의식하면서. 얜 역시 취향이 구식이야 도대체 어디 출신이지. 라고 묻고 있었다.
그래서 나두 애인이.라고 말꼬리를 흐린 건 다시 잘나가는 여자. 우리 둘의 시선이 의아스럽게 꽂히자 수줍은 소녀처럼 얼굴이 발그레지는 중년의 여자다. 실은 그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예요. 뭐 특별한 약속이 있는 건 아니구요.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있을 거예요. 그녀의 눈동자가 꿈을 꾸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언제나 자신의 뜻밖의 등장에 감격해 하는 남자의 표정 을 기대한다. 그 남자가 일하는 중간중간에 화장실 가는 도중에 운전하는 중에 비즈니스 상담하러 가는 막간에 잠자기 전 양치질하는 동안에 늘 자신을 떠올 리기를 기대한다. 그 남자가 오늘 어떤 계획이 있는 지 누구를 만나 기로 약속되어 있는 지는 여자가 그 남자를 사랑한 순간부터 이미 고려할 가치를 잃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자기판단이 미숙한 소녀로 되돌아가 있기 때문이다. 인형을 끌어안고 자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모든 여자들은 웬디스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 남자를 보호해주고 싶어하고 쓰다듬어주고 싶어하고 보듬어주고 싶어하 면서도 그에 의해 완벽하게 보호받기를 원하는 이중적인 감정이다. 나도 그렇다.
사랑에 빠진 여자들이 절대로 듣지 않는 충고라면 기대치가 낮아지면 극복도 쉽다라는 말이다. 이 여자들은 절대로 준비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사랑 이 권태로워질 날에 대한 준비. 증오로 바뀔 날에 대한 준비. 책임질 형태로 남아 법정에 서야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준비. 사랑을 빼앗길 날에 대한 준비. 사랑이 떠날 날에 대한 준비. 예기치 않은 사고로 사랑을 박탈당할 것에 대한 준비. 기대가 낮으면 상처의 극복도 쉬울 것이 라는 충고를 받아들일 준비.
아빠가 떠나간 후에 한동안 비틀거렸던 엄마의 모습이 그를 증명한다. 아빠의 퇴근길에 저만치 골목 어귀까지 나가 서있곤 하던 엄마. 자가용이 있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 데도 엄마는 언제나 아빠를 집 밖에서 기다렸고 거실 피아노 위에는 한다발의 꽃을 꽂아두었고 그리고 치장을 했다.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자기 일이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여자였다.라는 판단이 내려진 건 그후로도 한참을 지나서 내가 어른이 되어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남자를 잃는 경험을 얻은 직후였다. 어린 나이에 나는 세상의 많은 면을 이미 배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에 기대면 안되는 거야 라든지 그래서 여자는 강해야 해. 여자도 자기 일이 있어야 해. 전문인이어야 해. 자식은 울타리일뿐이야 따위의 것들을.
그해 겨울엔 함박눈이 빨랐다.
양손에 가득히 선물박스를 안고 들어선 아빠가 푸짐한 눈도 함께 몰고 온거라고 어린 나는 잠깐 생각했었다. 어디 여행갔다더니 내 선물만 잔뜩 사왔네 아빠가. 아니 눈도 사왔네 아빠가.라고. 생일이 겨울인 애들은 부모복이 없다더라. 그말이 딱이지 뭐냐. 저걸 어쩌냐 그래. 딱하기도 하지. 어른들의 대화가 스멀스멀 들려오는데도 나는 정신없이 선물포장을 뜯고 있었다. 그다음 아빠 곁에 딱 붙어서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었고 아빠의 무릎에 앉아 다리가 직각으로 굽어지는 바비인형을 신기하게 흔들며 놀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빛은 언제나 처럼 따스하면서도 눈부셨고 아빠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언제나 처럼 끈적이면서도 슬펐다. 그리고 그날밤 창밖에 함박눈이 그치면서 아빠의 빨간 승용차도 떠나갔다.
그후로 아빠는 주말마다 교실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일주일 만에 만나는 아빠가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 그에게 폭 안기곤 했다. 나는 그순간을 몹시 즐긴 것 같다. 긴 프렌치 코트를 입은 아빠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서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것도 나를 으쓱하게 했다. 어른들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아빠가 왜 우리와 따로 떨어져 사는 지도 어린 나는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있는 그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였다. 엄마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