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토록 비가 잘도 내립니다.
아마도 11월에 내리는 마지막 비일 것입니다.
아침에 우산을 챙기던 아이들이 눈이 왔음 좋겠는데.. 그럽니다.
녀석들은 아마도 저번날 밤에 잠깐 흩날린 첫 눈송이를 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하긴.. 저도 처음엔 어디서 티검불이 떨어져서 옷에 묻었나 했었으니까요..
모임장소에 가려고 택시에서 내리는데 손전화가 울렸었어요..
전화 받으며 잔 돈 챙긴다는 것이 그만,
지갑 뒷면에 동전 넣는 곳의 지퍼가 와르륵 열였지 뭐예요..
동전이 차르르하며 이리저리로 굴러가고..
순간 까르륵 웃음이 나왔었죠..
와.. 나 디게 부자네..
주섬주섬 이리저리 흩어진 동전들을
주변 지나가는 자동차와 주변가게의 불빛속에서 찾아 줍다가
아차.. 그곳에 들어있던 작은 열쇠 하나가 잘 있는지 생각났어요..
동사무소 책장이 있는 방 열쇠인데..
얼마 전에 동네에 새로 생긴, 책읽는 아줌마들 모임에서
총무를 맡았거든요..
열쇠는 다행이 아직 그 속에 잘 있었어요..
그런데 아뿔싸.. 더 중요한 게 있었라구요..
내 도장..
아주아주 오래전..
초등학교때 3학년때인가 언니가 파다줬던,
뚜껑은 이미 달아나버린 내 아담하고 까만 뿔도장..
며칠 전에 은행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거기 넣어두고는 계속 그냥 가지고 다녔었어요..
무슨 일이든 순간이죠..
미리 이렇게 했더라면.. 하고 후회해도 그땐 이미 소용 없구요..
맨홀 근처에서 동전들이 와르륵 쏟아져서 튕겨져 나갔었는데..
아마도 그때 맨홀 속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합니다.
맨홀 속을 들여다보니 물소리가 나고 있었어요..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이야 농협이랑 국민은행밖에 없으니
통장 도장들을 새로 바꾸는 일이 그리 복잡하진 않겠지만,
내앞으로 등록된 재산 없으니 별로 쓸 일이 없는 인감도장도 새로 갱신하면 될 것이고..
다만 오랫동안 지니고 다니던 작은 마스코트를 잃어버린 기분.
잠시 멍~해져서 그곳에 그냥 서 있었죠..
하지만 약속시간이 다 된 것을 기억하고 곧 신호등을 건너야 했어요..
모임이 끝나고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다시 신호등을 건너
그 자리로 와야했습니다.
난 혹시나 하고 다시 도장을 찾아
어둠에게 더 많은 자리를 잠식당한 바닥을 이리저리 둘러봤죠..
그리고는 다시 한동안 멍~~
그때였어요..
무엇인가 내 옷깃에 떨어지지 않겠어요..
음?? 뭐야?? 뭐가 위에서 떨어지는 거지??
티검불인 줄 알고 톡톡 털다가 보니까.. 세상에나..
눈이지 뭐예요..
그때의 놀라움.. 그때에 느껴지는 따스함..
정신없이 허둥대다 갑자기 텅~ 빈 느낌으로 길거리에 황망히 서 있는 나를
생각지도 않았던 눈송이가 장난처럼
올해 첫인사를 건네고있는 것 아니겠어요..
저 멀리 사라져버린 꿈들과 세월들은 모두
기억속에만 고이 간직하면 되는 거라는 듯이.
단, 하나도 잊지 않으면 된다는 듯이.
그때 문득 떠오르는 전화걸어 첫눈이 와요!! 라고 말 해 주고 싶은 이.
난 어느새 한 껏 들떠 있었어요..
40이 어느새 훨씬 넘은 중년 아줌마거니..
장승만한 아이들이 곁에서 자라거니..
흰머리가 희끗해가는 남편에 점점 연로해져 가시는 어른들
내 발목을 날마다 붙들어 자유롭지 못하거니.. 훗..
첫눈이 온다고 말해 주고픈 이 아직 마음 속에 살고 있고
기쁨으로 들뜰 수 있는 감성 아직 팔팔하게 수그러들지 않았음이
생각하니 잠시 웃음이 나왔지만 그게 바로 아직 나라는 여자인 걸요..
그렇게 그날 아주 잠깐 날린 첫눈발을 용케도 길에 서서 맞을 수 있었답니다.
오래된 그 뿔도장이 곧잘 들떠버리는 주인을 닮아서 어디로 휙~
튀어버린 덕분에 말이죠.. 쿠쿠..
제자리에 고이 잘 있어 줬더라면 그 시간에 전 거기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고는 아직 우리아이들처럼 첫눈을 기다리고 있겠죠.. ^^
누군가는 그 아주 잠시 내린 눈발을 아직 첫눈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데..
전 단연코 그 눈이 첫눈이었다고 인정합니다.
아무리 이다음에 흰눈이 펑펑 내린다 한 들..
그 생각지도 못했던 올해의 첫 놀라움과 설레임만큼은 아닐테니까요..
첫눈 맞으셨나요??
못 맞으셨다고요??
그래서 아직 첫눈을 기다린다고요??
전.. 첫눈.. 맞았습니다.. ^^
炅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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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 N' Roses의 November Rain을 올립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랑을 부정하는 노래인가 했더니..
차갑고 두려운 11월의 비도 영원하지 않다는,
어둠에 신경쓰지 말고 마음을 열고 시작하자는 노래입니다..
11월의 비가 잘도 내리는 밤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이 기다리는 첫눈을 재촉하는 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