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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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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무 아래서...


BY 행운목 2003-09-04

가벼운 기침과 함께 9월이 시작되었다.
가을...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늘 몸이 먼저 느끼곤한다.

그래도 심하지 않게 넘어가야 할텐데...
앓을 시간조차 없이 바쁜 사람에게 웬 사치람...

결혼전 10년을 다닌 직장엔 운 좋게도 잔디 곱게 입힌 정원이랑 점심식사후 족구를 하곤하던 운동장이 있었다.
빌딩숲에서 갖혀 지내던 친구들에 비하면 내가 20대를 보냈던 그 곳은 나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주곤 했었다.
그 정원 가운데 몇 그루의 후박나무가 있었다.
점심 식사후엔 늘 이 나무아래 모여서 동료들과 수다도 떨고, 책도 읽고 했었다.

가을이 되면 누렇게 퇴색한 잔디와 단풍이 조화된 정원의 나무들과 함께 갈색으로 빛나던 축 늘어진 후박나무잎들은 파란 가을하늘과 함께 한폭의 그림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젊은 나이의 무모함도 없고, 치열함도 없이 왜 그렇게 자기 삶을 방관자처럼 바라보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타고난 성격탓이었으리라.
한번 나락으로 떨어지면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었던 우울이 달거리하듯 꼬박꼬박 찾아들었다.

그랬던것 같다. 존재의 회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회의...
자신의 일을 늘 남의 일처럼 무감각하게 느끼곤 했으니까...

걱정 근심 없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할 그 나이에 왜 그렇게 온갖 세상 고뇌를 짊어지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를 우울의 나락에서 빠져 나오게 해 준 건 동료들과의 산행이었다.
토요일이면 배낭을 짊어지고 출근을 하곤 했다.
아무 생각없이 산을 오르다 보면, 숨이 턱에 턱턱 차오르고, 이마에서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갈증으로 입술은 바짝 타들어 가곤 했었다.
그때 마시던 한방울의 물. 또는 한 입 베어먹은 오이...는 정말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맛 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모두 같은 모습인 것 같은 산들이 다 사람처럼 제각각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걸 그때 알았다.


그러다가 정상에 올랐을 때의 그 희열. 정말 오를때마다 내가 이 고생을 왜 사서 하나 하다가 바람 부는 정상에 올라 산아래를 내려다 보면 나를 감싸던 온갖 시름들이 다 한줌의 먼지가 되어 바람에 날아 가곤 했었다. 그 때문에 주말이면 다시 배낭을 챙기곤 했던 것 같다.

결혼 후엔 한번도 산을 오른적이 없다.
삶과 타협하고 사정없이 쪄 버린 살 땜에 지금 산을 오른다면 아마 그 때의 몇배의 고통을 느끼리라 생각만 해본다.

산행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혼자 가기도 힘들건만 동료들은 무거운 내 배낭을 기꺼이 매주곤 했었다. 힘든 코스를 만나면 손을 내밀어 주고, 뒤 쳐지면 기운을 북돋워주고...

참 마음이 따스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꼭 그렇게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살고 싶었는데....

아니 모르겠다. 지금은 저렇게 차갑게 식어 버린 나랑 살고 있는 남편도 그런 따스함을 한때는 가지고 있었는지도...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 산행을 하는 꿈을....